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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블 밝은 달에 Oct 16. 2020

경주 가을 도보 여행

황룡사역사문화관에서 분황사까지 나의 살던 고향은 by 꽃작가


[황룡사지 / 황룡사 역사 문화관]

지난 여름, 황룡사지. 여름 코스모스가 피었고 멀리 황룡사 역사 문화관이 보인다.


황룡사 빈터를 채우고 있던 여름 코스모스가 떠났다.

봄이 오고 노란 유채꽃이 이 터를 채울 때까지

겨우내 큰 눈이 오지 않는다면 이곳은 또 내내 비어 있을 테다.


그래서 좋다.

황룡사지는 비어 있을 때 더 웅장하고, 더 부산스럽다.  이곳은 내가 태어나 기억이 남아있는 순간부터 빈터였고 엄마와 눈사람을 굴리던 곳이었다.     

 

‘여기가 원래는 아주 큰 절이 있던 곳이란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던 곳이란다, 수많은 사람이 머물던 곳이란다.’ 조금 커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은 뒤 다시 황룡사지를 찾았을 때 사방에서 차오르던 어떤 기운(혹은 그저 기분)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없었지만 활기가 넘쳤고, 텅 비어 있었지만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꽃들이 재잘거릴 때, 꽃들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보다 빈터에 달빛만 가득 찰 때, 바람만 수북할 때 찾아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맘대로 황룡사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기사 사진. AR로 복원환 황룡사 일부


최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황룡사의 건축물 중 통일신라 시기의 중문과 남회랑을 디지털로 복원했다고 한다. 증강현실을 이용해 빈터에 서서 황룡사의 추정 복원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금당과 9층 목탑까지 차례로 디지털로 복원할 계획이라는 기사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이 빈터에 토목공사가 진행되는 걸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걸로 충분하다. 오래오래 이렇게 빈터로 남아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낮과 밤이 오가는 모습을 오롯이 담아내 주면 좋겠다.     


[황룡사 마루길따라 가을 산책]


어디에서 시작해도 좋다. 분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황룡사지와 박물관 쪽으로 걸어도 좋고. 황룡사 역사문화관이나 동궁과 월지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분황사 방향으로 걸어도 좋다. 황룡사 마루길은 박물관에서 분황사까지 연결하는 작은 도로에 조성된 산책로다. 나무데크가 마루처럼 깔린 이 길은 2013년도에 조성되었다.     


황룡사마루길. 황룡사역사문화관 주차장에서 분황사 가는 길이다. 길 한쪽에 도보용 나무데크가 깔려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찻길을 등진 채 분황사를 향해 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는 이 길 끝에 있는 구황동 골목 안 작은 집에 살았다. 동네 아이들은 분황사로 우르르 몰려가 놀다가, 심심하면 이 길을 따라 박물관까지 걸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다는 건 그런 거다. 궁궐터에서 보물찾기하고, 절터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술래잡기를 한다. 내가 지금 구르고 뛰고 있는 발밑에 무엇이 있는 지도 모른 채로.     

 

어쨌든 이 길은 어린 나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늦가을 학교에서 코스모스 씨앗을 받아오라는 숙제가 떨어지면 (아직도 왜 그런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켰는지 모르겠고, 참고삼아 말하자면 나는 80년생이다) 아이들과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부러진 연필심 같은 코스모스 씨앗을 훑었다. 그때는 길 양쪽이 모두 코스모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이 길을 걸었다. 꽃은 곱고, 하늘은 근사하다. 왼쪽으로는 논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황룡사지의 빈터가 펼쳐진 좁은 도로가 도시에서 온 여행자들에겐 꽤 운치 있고 매력적인 길로 다가오지 않을까.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이 길을 무수히 걸어 다닌 내게도 이 길은 여전히 예쁘고, 올 때마다 행복한 곳이니까.      


동궁과월지 혹은 박물관에서 분황사까지는 도보여행 하기에 정말 좋은 코스다.


황룡사 마루길을 잇고 있는 가로수는 모두 벚나무다. 조금 더 지나면 단풍이 근사해질 테고, 봄이 오면 벚꽃이 터져 나올 거란 뜻이다. 벚꽃 시즌 보문단지 가는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차를 두고 이 길을 걷자. 나만 알고 싶은 경주의 벚꽃 명소를 또 이렇게 한 곳 털어놓는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약하다.


벚꽃시즌 황룡사마루길에서 분황사 가는길




[분황사]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되었다는 분황사.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이며 국보인 모전석탑이 있는 곳으로 아름다움을 떠나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심심하면 가서 뛰어놀던 곳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곳의 귀함과 아늑함을 알아보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황룡사지 빈터에서 말로 표현 못 할 아름다움을 마주친 것처럼.          

       

현재 분황사는 자그마한 규모의 절이다. 둘러볼 것이 많다기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볼 풍경이 많다는 뜻이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그 형태가 매우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 모전석탑은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라는 뜻으로 벽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구운 벽돌이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이다. 신라 최초의 석탑은 아마도 중국의 영향으로 이렇게 모전석탑의 형태로 세워졌을 것이라 한다.   

   


분황사 모전 석탑의 원래 모습이 어땠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네 모서리에 놓여있는 사자상도 통일신라 시대쯤 생겼을 것이라 하고, 원래 석탑의 높이도 3층이 아니라 7층 혹은 9층으로 그 높이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라고 한다. 후에 황룡사 9층 목탑과 함께 서 있었을 장면을 떠올려보면 주변의 공기가 순간 신성하고도 웅장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마다 간절한 염원들을 담고 이곳을 오갔을까. 이곳은 수많은 진심과 사랑이 쏟아 부어진 공간일 것이고, 나는 빈터에서 그 마음들의 일부를 만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뛰어다니며 놀던 나는 참 복 많은 아이였다.     



한참을 걸은 후 앉아서 쉬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황사 나무 그늘 아래 잠시 머물렀다.


유모차에 매달린 투명 풍선이 예쁘네, 나 어릴 때 모전석탑 사자상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구나. 이제 금방 단풍이 들겠다. 그땐 텀블러에 차를 담아와야지.


분황사 참 예쁘구나. 예뻐.





*황룡사마루길-분황사 도보여행 꿀팁


황룡사 마루길 끝에서 분황사 방향(오른쪽)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역사 깊은 구황반점, 맛있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판매하는 핫플레이스 카페 ‘스펑크’, 편의점, 화랑초등학교,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특히 구황반점은 자장면 小자 2000원, 中자 3000원, 大자 4000원에 미니 탕수육은 무려 7000원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구황동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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