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셔블 밝은 달에 Oct 08. 2020

경주의 맛 5

우리 동네 빵 괴물 '브래드 몬스터' by 진연

왜 인지는 모르겠다.  비대면의 생활 동안 집밥에 질린 건지, 그저 입맛이 변해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요즘 빵이 너무 좋다. 원래도 빵순이 소리를 들을 만큼 좋아했다만 예전과 다른 종류의 빵이 좋다. 단 맛이라곤 1도 없는, 우유도 계란도 버터도 들어가지 않은 빵. 식사빵이라고도 하고 유럽빵, 혹자는 뻑뻑한 빵이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정말이지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달콤한 빵이 싫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리하여 요즘의 최애 아침 식사는 바게트나 깜빠뉴, 치아바타에 과일을 곁들인 그릭 요거트와 커피. 방금 잠에서 깨어나 입맛이 없는 상태라도 이 메뉴라면 식탁에 앉게 된다. 농담으로 반평생은 한국인으로 살아왔으니 남은 생은 그리스인으로 살겠다! 고도했다. 밥을 차리는 사람이 이런 상태이니, 가족들도 유럽식 아침에 적응하거나 직접 차려먹거나의 기로에 서 있다.

그날도 예외 없이 기름기 하나 없는 빵을 고기 뜯듯 먹어치우던 아침이었다. 온라인 수업 기간이던 고딩 아이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그랬다. “요즘 트로트가 왜 이렇게 인기지? 나는 언제쯤 좋아하게 될까? 영영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쩌다 아버지 차를 타면 제목도 알 수 없는 트로트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멀미가 나곤 했다. 외모부터 식성까지 빼다 박은 아버지여도 노래를 듣는 취향은 달랐다.


의문형이었지만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아이는 뜻밖에 흥미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엄마는 서양 형 노인이라서 그래. 트로트 대신 클래식 듣잖아”, “뭐라고??”

노인 소리에 잠깐 정신이 혼미해졌다. 선을 넘은 거 아닌가 말이다.  


청소년이 말한 이론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사람은 두 종류의 늙은이가 된단다. 동양형이거나 서양형이거나.

트로트 대신 클래식을 듣고, 국과 찌개를 곁들인 아침 대신 빵을 먹는 나는 고로 서양 형 노인. 어떤 장르가 더 우위에 있다가 아니라, 기질에 따라 취향이 갈리고 트로트든 클래식이든 청소년이 보기엔 노인의 취미라는 얘기다.


예전에 베를린 여행 중에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장에서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백발의 동네 노인들 틈에서 유일한 동양 젊은이 관객으로 노래를 듣는 내내 꿈꿨다. 나의 노년도 이들과 같기를.


그렇다면 나는 꿈을 이미 이룬 건가?


예외 없는 이론은 없다고, 청소년이 말한 동양형 어쩌고도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최근 입맛의 변화를 보면 딱히 반박하기도 어렵다. 언제 또다시 바뀔지는 몰라도 현재의 상황이라면 나는 서양형 노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래가 보이니 결심이 쉬워졌다. 학군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이 오면 삶의 터전을 옮겨야겠다. 역세권, 숲세권도 아닌 빵세권으로. 다행히 경주에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빵집이 여럿 있고, 사랑해마지 않는 <브래드 몬스터>는 주택가에 있음으로, 노년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아파트 촌에 위치한 빵집 <브래드 몬스터>는 이미 유명해서 소개가 또 필요할까. 얼마나 사랑받는 곳인가만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점심시간을 넘기고 가면 대부분의 빵이 없고, 의자에 군데군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들 또한 기다리는 손님이라서 들어가자마자 계산대로 직행해 주문을 하면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오후 2시쯤 갔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빵 쟁반 곳곳이 비어있었고, 아침 한 끼 정도 먹을 양의 깜빠뉴가 남아있어서 주문하고, 이 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어니언 크림치즈를 샀다. 순간 뒷 손님이 다급해졌다. “크림치즈 더 없어요? 빼놓은 하나는 안 파는 건가요?”


주문을 받던 사람 말로는 아마도 양이 조금 모자라서 사장님께서 빼놓은 것 같다며, 치즈는 이걸로 끝이라고 했다.

눈으로 보기엔 티도 안나는 차이건만, 팔 수 없다는 철칙에 믿음이 갔다. 하지만 기다리던 손님들 사이에선 방청객의 탄식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없다니. 아이 손을 붙잡고 내일 다시 오자며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샀다는 안도감과 못 산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안고 나왔다.

저도 말이죠. 원하는 빵을 원하는 만큼 사 본 적이 없어서요. 마음속으로 우물우물 되내면서.

그래서 살어리 살어리랏다.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들르기 위해. <브래드 몬스터> 앞에서 살어리랏다.


몬스터처럼 아구아구 먹게 만들겠다, 지은 이름처럼.

<브래드 몬스터> 앞에서 브래드 몬스터로 살고 싶다.  날을 그리며, 습관처럼 벼룩신문을 뒤적여 본다.  


ps. 빵집 옆에 커피맛이 좋은 다방이 있다. <원다방>이라고. 빵과 함께 이곳의 커피까지 사서 들고 있노라면

 코로나 때문에 갈 수도 없지만, 유럽 왜 가냐, 소리가 절로 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