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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블 밝은 달에 Jul 31. 2020

'넘버2' 박물관의 '넘버1' 전시

국립경주박물관 관람을 위한 안내서 by 박pd

경주를 부르는 흔한 표현 중에 ‘노천 박물관'이란 말이 있다. 도시 곳곳에 능과 사원, 탑과 유적, 유물이 '노천(露天)'이란 단어의 뜻처럼 '이슬 떨어지는 한데(야외의 경상도 말)'에 천지빼까리(정말 많다의 경상도 말) 있다는 말이니 경주와 어울리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규모로 넘버2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있으니 실내와 실외를 두루 갖춘 박물관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주 개발의 첫 삽을 뜬 후부터는 수학여행의 메카가 되었고, 역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간에 경주 오면 국립경주박물관 들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이니 ‘박물관의 도시'란 부제가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박물관에 대한 경주 사람들의 애정도 남다르다. 인구가 채 30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에, 한국의 넘버 2 박물관이 있으니 ‘박물관만큼은 우리가 대한민국 넘버 2! 서울에 있는 중앙박물관도 우리 갱주 유물이 없으면 별거 아인기라~’하는 유물부심, 박물관부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부설 박물관 대학이 수십 년째 운영되고, 매년  꾸준히 동문을 배출하다 보니 오다가다 만난 경주 어른들께서는 '그래~ 박 선생은 박물관 대학 몇 기냐?'는 인사가 필요한 동네라면 경주 사람들의 박물관 사랑만큼은 넘버 1이면 넘버 1이지~ 넘버 2는 아니지 않을까.

 영화 ‘넘버 쓰리’도 아니고, 서열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넘버2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No.1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일제시대인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과 다량의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 일본은 대대적이지만, 날치기로 발굴을 시작했고, 연이어 스웨덴 황태자까지 조연으로 동원해서 발굴한 서봉총에서도 금관 등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경주는 황금유물이 가득한 신비한 고고학의 유적지로 인식되었다. 누가봐도 쇼킹했던 금관과 황금유물들은 경성의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전시되었다. 이후 1935년 평양 박물관에서는 경성 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금관 전시가 있었는데, 이 때 mbc의 '서프라이즈'에 나올만한 사건이 터지면서 신라 유물들의 경주 복귀와 함께 박물관 신설의 필요성이 경주 사람들 사이에서 대두된다.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의 서봉총 발굴 참여 사진

 평양 전시가 끝날 즈음, 평양에서 힘 좀 쓴다는 고관대작들의 술자리에 금관총의 금관이 들려갔고, 술이 오른 이들은 평양 기생 차릉파에게 금관과 황금 장신구 풀세트를 두르게 하고 기념촬영을 했는데, 이 일은 부산일보의 보도로 들통난다. 몰상식한 술자리에까지 신라의 유물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15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금관도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즈음 경주에서 쏟아져 나온 황금유물은 경주 사람들의 자부심을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찬란한 유물을 만든 선조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고퀄의 황금유물을 만들 정도의 민족이라는 자신감까지 업그레이드되어 유물의 외부 유출을 막고, 경주에 보관하자는 시민운동이 생겨났다. 그런 과정에서 금관총의 유물을 보관하던 최초의 박물관 '금관고'가 탄생했고, 1926년엔 조선총독부 부설 박물관 경주분관이 생겼으며, 해방 후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75년부터는 현재의 위치인 인왕동으로 신축 이전되어서 운영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메인 건물인 신라역사관과 월지관(구 안압지관), 신라미술관, 특별전시관, 영남권 수장고까지 총5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넘버 2 규모의 박물관인 만큼 전시관을 다 보려 한다는 것은 유물과의 '스치듯 안녕~'이기에 이 글에서는 제목처럼 경주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비교적 최근에 개장된 전시 중 최애 전시만 모아 소개하려한다.

신라미술관

 첫 번째는 사천왕사지에서 발굴되어 복원된 녹유신장벽전이다. 신라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본관의 어마 무시한 전시 유물의 규모에 지친 분들에게 추천한다. 신라 유물 중 돌과 금속재료로 만들어진 석물과 불상을 주로 전시하고 있고 은은한 조명 아래 유물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신라인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을 한 걸음 물러서서 느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가장 핫한 유물은 '녹유신장벽전'이다. 100년 전 사천왕사지 발굴(1915년)에서 수천 개의 파편으로 깨져 발견된 조각을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현대의 3D 스캔 기술을 이용해 복원을 시도하면서 짝을 찾지 못했던 조각들의 퍼즐이 맞춰져 세 종류의 녹유신장상 복원에 성공했다.

녹유신장상 파편 모습
복원된 녹유신장벽전

 일단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백 년의 기다림'이란 전시 제목부터 흥미롭다. 1500년 만에 발굴된 유물이 다시 100년이란 시간을 견디고 재결합되었다는 스토리에 미술적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사지에 있었던 탑의 기단 벽 4면에 설치되었던 장식품인데, 쉽게 말하면 틀로 찍어서 만든 흙 조각상을 '녹유'란 코팅제를 발라서 구워낸 타일이나 도자기 벽돌 같은 것이라 '녹유신장벽전'이라 부른다. ('벽전'이 바로 벽돌 혹은 타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신장은 불교에서 악신을 쫒는 장수라는 뜻. 녹유신장상은 돌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흙을 다듬어 틀(거푸집)을 만들어 찍어낸 뒤 녹유를 발라 구워낸 것이라 요즘 말로 '디테일이 쩐다.’(실제로 신장상은 탑의 사면에 3개씩 장식이 되어 있었고, 총 12개의 벽전이 필요했기에 틀을 이용해 한번에 여러 개를 제작한 것 같다) 화려한 갑옷의 표현부터 섬세한 표정 묘사까지... 신장은 근엄하면서도 단호하고, 아래에 깔린 악귀의 표정은 두려움이 가득 서려있다. 비전문가의 가방끈 짧은 의견이지만, 섬세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섬세하다'와 '강하다'는 공존하기 힘든 형용사인데, 녹유신장벽전에서는 가능하다. 한편, 이국적 느낌도 강해서 혹여 인도나 앙코르왓에서 녹유신장상을 봤다하더라도 현지의 조각으로 알았을 정도다. 그즈음 신라에서 비슷한 작품을 많이 남긴 예술가이자 승려인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측하는데, 기록(삼국유사)에 의하면 양지 스님 출생이 묘연하고, 남긴 작품이 기존 신라풍과는 달라 외국인 이었거나 유학승이 아닐까 추측한다니 꽤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신라미술관을 채우고 있는 다른 불상들이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 소박하면서 편안한 느낌이라면, 녹유신장벽전은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강해 보이니 많은 유물 가운데서도 유독 눈이 간다. 파편에서도 이처럼 특별함이 돋보였기에 2년이란 긴 시간의 협업으로 복원했을 것. 한 번은 복원을 담당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취재차 들른 적이 있는데, 녹유신장벽전의 완벽한 복원을 위해 수많은 흙 조각상과 레플리카(복제품)를 만들 걸 보았고, 파편을 채우고, 메우고, 붙여 이었을 작업자분들의 노고가 느껴져 녹유신장벽전의 복원품이 한결 더 대단해 보는 것도 사실이다.

'1500년의 기다림, 백 년 만의 합체'를 볼 수 있는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를 넘버 1 전시로 강력 추천한다.

 두 번째 전시는 2020년 6월 12부터 특별전시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말, 갑옷을 입다' 이다. 최근 10년 사이, 박물관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시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왜냐면. 발견에서 복원과 전시까지 딱 10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2009년 쪽샘지구라 불리는 황오동 C10고분에서 말에게 입히는 갑옷, '마갑(馬鉀)'이 출토되었다.

마갑의 발굴 현장

고구려 고분에 등장하거나 혹은 십자군 전쟁의 배경인 서양 중세 영화에나 나올법한 것이 말 갑옷. 동서양의 모습이 다르지만... 갑옷을 입은 기병이 철갑을 두른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은 현대의 탱크처럼 적에겐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마갑이 실제 무덤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마갑, 말투구(마주), 재갈, 안장, 등자(발걸이)- 발견되었다. 마갑은 무덤 주인의 관 아래 안치되어 있었는데, 주인의 주검은 사라졌지만 마갑은 남았다. 풀세트 마갑의 출토는 한국 최초여서 학계나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이런 관심에도 전시까지 왜 10년이란 시간이 걸렸을까? 땅속에 묻혀 있던 대로(화석 같은 모습이었을 듯) 보존 처리하여 전시했다면 경상도 말로 후딱~ 할 수 있었겠지만, 발굴을 맡은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를 살려 고구려 벽화 속에서나 남아 있던 말갑옷을 완벽하게 복원, 재현하기로 결정했던 것. 마갑의 출토와 복원을 담당했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에 의하면 ‘발견 당시 모습은 흙속에 묻힌 손등만 겨우 볼 수 있는 상태였다. 마갑의 손바닥까지 보고, 어떻게 제작되었는지까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유물의 완벽한 발굴과 복원을 위해 마갑이 놓여져 있던 흙덩어리 전체(무게가 28톤)를 특수기법을 이용해 연구소로 옳겼고, 2천 년이란 시간이 쌓인 흙을 아래에서부터 제거하고 난 다음 740매나 되는 편주(갑옷의 철 조각)의 연결을 풀어서 갑옷의 제작과정을 알아냈다. 당시의 모양 그대로 갑옷을 만들어 말에 씌어도 보고, 정말 이 갑옷을 입고 말이 움직일 수 있는지도 파악했다고 한다. 문화재 연구소분들에게 성덕(성공한 덕후)의 향기가!!! 고고학은 이제 인디애나 존스에서 맥가이버 단계로 넘어간 모양이다.(이거 이해하면 옛날 사람 ㅜㅜ)

재현된 마갑와 기수
복원 전시된 마갑

 이번 전시가 특별한 점은 이처럼 마갑의 완전한 복원과 재현을 위해 들어간 연구자들의 노력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를 통해 마갑의 무게는 대략 36kg, 당시 신라 말의 크기가 제주 조랑말보다 조금 컸다고 하니 꽤나 무거운 편이다. 마갑의 발굴과 재현 과정을 통해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되었지만 사실은 더 많은 궁금증이 남겨졌다고도 할 수 있다. 마갑을 씌우고, 갑옷을 입은 장수가 탄다면 말이 견뎌야 할 무게가 대략 120kg 정도, 과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전시의 말미에도 이런 질문이 있다. “말갑옷이 실제 전투용이었을지 아니면 의례용이었을지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철갑옷을 입은 장수와 말이 맹렬한 기세로 선두에서 돌격하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지만 그저 중앙에 묵묵히 서 있기만 해도 적들을 압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2000년, 짧게 잡아도 1700년 동안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던, 고대의 말갑옷을 실물로 볼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기적 같은 전시. 국립 경주박물관을 오게 된다면 놓치지 않길 바란다.



ps : '말, 갑옷을 입다'전은 이번에 발굴 재현된 쪽샘 c10분 출토 마갑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발견된 다양한 마갑, 말 투구, 고구려 고분 벽화 모사도 등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6.13-8.23 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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