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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을마음 Jun 05. 2021

'국민OO'이 사라진 시대에 책을 고른다는 것

누군가에게 웃음이나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리고 그 멋진 일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웃음과 공감을 주는 것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누군가는 자신이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함으로써 해내고,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캐릭터에 반전을 부여함으로써 웃음이나 감동을 준다. 여기서 필요하는 것은 맡은 역할이나 가진 캐릭터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다.


지인들과의 대화가 재미있으려면 그들 사이의 공감대가 필요하고, 예능 프로그램이 재미있으려면 나오는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몰입이 필요하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맘껏 웃으려면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평가할 준비 말고. 사람들은 개그콘서트가 망한 이유가 예전만 못한 개그맨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혹은 세상 돌아가는 일이 더 개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의 달라진 태도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웃겨봐. 웃기는지 안웃기는지 보겠어.


설상가상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활동으로 TV보다 유튜브에서 더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재미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각각의 이용자들의 니즈에 맞춘 채널들을 소개하고, 내가 구독한 채널에 등장하는 유튜버 이야기는 친구의 친구로 넘어가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게 당연해졌다. 각자의 취향은 다양해졌다. 긍정적인 단어로는 다채로워졌고, 부정적인 단어로는 파편화되었다.


그런 사이 TV프로그램은 말그대로 '고인물의 향연'이 되어 가고 있다. 새로운 캐릭터가 나와서 대중들의 채널을 고정하기가 쉽지 않다. 공채 개그맨이 나와도, 유튜버가 나와도 모르는 사람인 건 마찬가지다. 끼 있는 사람들도 TV보다 유튜브를 노리는 편이 자신을 더 빠르게 알릴 수 있는 시대이기에 당분간 TV에서 새로운 국민MC나 국민아들, 국민여동생 등이 나타나긴 어려울 것 같다. 


책방의 생일책 대다수는 소설이나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남의 이야기나 허구의 이야기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책들을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이야기가 뛰어난지, 남들의 평가가 어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파편화된 우리 취향이 이 책들을 만난 독자들이 책을 고르고 결제하고 책장을 넘기게 되는 데에 조금 편안함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차트가 큰 역할을 했다. 남들이 듣는가, 남들이 봤는가, 평론가들의 평가는 어떤가. 그런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음악차트는 공신력을 잃었고, 코로나 이후 시대에 영화티켓으로 갈 돈을 긁어모은 넷플릭스는 수많은 양질의 콘텐츠를 한꺼번에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과거와 다른 고민에 빠졌다. 뭘 골라야할지 고민하는 피곤함 속에서 콘텐츠 하나를 선택하면, 그걸 소비하는 도중 다른 생각이 들게 된다. '이거 말고 더 재미있는게 많을텐데 꼭 이걸 보고 있어야 하나?'


종이책은 이 고민을 차단해야 접할 수 있는 즐길거리다. 한 손으로 책을 읽으며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물건의 특성상 반품이 어려워서 구입 단계부터 각오를 해야 한다. 하물며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책이라니. '내가 이 책을 선택했다'는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결제단계까지 가는 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 책방의 책 구입률은 다른 책방보다 월등히 높은 편이다.


 블라인드 데이트 북은 소비자의 고민을 덜어 준다. 고민하기를 그만두고 책을 만난다. 그리고 선택한다. 그 책을 열어 이야기를 읽어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여러 각오를 하고 책을 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어야지. 잠시 다른 관심들을 꺼 두어야지.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책이니 마음을 열고 읽어봐야지.

그것만으로도 작가들은 TV에 출연하는 신인개그맨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독자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두게 된다.


 비평과 판단이 당연해진 세상에 누군가가 마음을 열고 내 콘텐츠를 봐 준다는 것, 그 시간을 위해 다른 것들을 잠시 손에서 내려놓았다는 것, 작가와 독자가 만난 계기가 문장의 화려함이나 표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콘텐츠와 전혀 관계없는 '생일'이라는 것. 

흔치 않은 만남이다. 그래서 책방에서 책을 사는 손길들 모두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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