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선들은 우리가 슬퍼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13살이 된 바니가 뼈가 도드라진 마른 몸으로 휘청휘청 걸어 다니면,
“어떡해”, “아이구 불쌍해라”, “쟤는 안 보이나 보다.”
염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불편한 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하루가 통째로 슬프거나 불행했던 적은 없다.
물론 나도 바니가 점점 앞을 보지 못하게 될 때는 세상이 한순간에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요즘 반려견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바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시력을 잃었고,
바니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아직도 너무 많았기에.
유명하다는 강아지 눈 전문 병원을 찾아갔고, 수술 날짜도 잡았다.
검사비, 약값, 수술 준비까지—본격적인 수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수백만 원이 훌쩍 깨졌다.
하지만 반짝이는 까만 눈을 다시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건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꼭 마법을 쓴 것처럼, 수술 직후 시력을 되찾았다.
(간 수치가 높아 수술 일정이 계속 미뤄졌고, 결국 한쪽 눈만 수술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빛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앞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지만, 늘 삐죽한 코가 장애물에 먼저 부딪힌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달 지나니까, 어느새 그 길쭉한 코가 지팡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잘 놀라는 법도 없다.
사람도 그렇듯,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한다고 하던데—
바니는 후각이 이제 보통 개의 100배쯤 되는 것 같다.
아니, 300배쯤은 될지도 모른다.
분명 저 멀리 주방에서 조용히 간식을 꺼냈는데,
어디선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앉아 있다.
시각을 대신하는 건 후각이고, 장애물을 피하는 건 그 길쭉한 코의 몫.
잘 때도 귀를 바짝 세우고 자는 걸 보면, 아마 청각까지 총동원하고 있는 거겠지.
이렇듯 우리는 세상에 적응해 나간다.
집에서는 거의 맵 다 외운 수준이다.
식탁 다리, 소파, 캣타워 위치까지 꿰고 능숙하게 커브를 틀고 다닌다.
나도 이제 바니의 발걸음 소리에 애태우며 바라보지 않는다.
바니는 전에는 없던 조신한 발걸음과, 은은한 도자기 유약처럼 깊이 있는 눈동자색을 얻었다.
바깥공기도 쐬고, 다른 친구들 냄새도 맡으라고 가끔 개들랜드 운동장 한가운데 놔두고 들어오면
어느샌가 건물 안에 있는 내 자리까지 찾아와 있다.
(따뜻한 날에는 정말 다른 친구들 냄새를 맡고 나를 찾아온다.)
동생 ‘오월이’와 ‘그레’도 용케 구분한다.
‘오월이’ 면 보듬어주고, ‘그레’ 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짜증부터 낸다.
집에서 작업하는 내 책상 아래는 대리석 바닥이라
털도 지방도 없는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들에게는 제일 인기가 없는 곳인데,
어디선가 쿠션을 밀고 내 자리 밑으로 와 이렇게 웅크리고 있다.
우리는 이마저도 특별 대우하고 싶지 않아서
“바니 사실 보이나 봐! 우리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안 보이는 컨셉 지키는 거야.”
라고 놀리고 만다.
시각을 잃었다고 세상을 잃은 게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물론 어린 강아지의 폴짝이는 모습,
새로운 훈련을 습득하고 성장하는 짜릿한 감동은 없고,
이제는 척척 해내던 손, 기다려도 다 잊은 것 같지만……
이렇게 쿠션을 가지고 내 옆을 찾아오는 모습처럼,
뭉클해지고 벅차오르는 순간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저 교감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지, 그 본질은 더 짙어졌다.
함께한 시간들이 그만큼 많으니까.
나도, 바니도, 이 세상에 자알 적응하고, 자알 살고 있다.
분명 바니에게 소중한 마음을 써주는 거겠지만,
걱정의 시선과 멘트는 이제 넣어두어도 좋겠다.
불완전해 보인다고 해서 불행할 거라는 착각은, 이제 거둬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