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이 무심히 가져간 글, 저의 꼬박 하루였어요.

by wona


처음엔 뿌듯했다.

우리가 만든 이용수칙을 ‘복사+붙여넣기’수준으로 옮겨 쓰는 곳을 봤을 땐,

비슷한 포토존이 다른 반려견카페에 등장했을 땐,

‘우리가 제법 하나보다’ 하고 우리끼리 돌려보고는 넘어갔다.


나는 반려견운동장에서 매니저로 공간을 운영하며,

기획부터 문구 하나까지 직접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브랜드 매니저’라는 말은 좀 거창한데,

여러 업무를 넘나드는 지금 내 역할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용수칙을 쓸 땐,

정확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 없이 읽혀야 한다는 바람 사이에서

단어 선택, 말투 하나하나를 시간을 오래 들여 고민했었다.


포스터의 색 배색이나 표현 방식 역시

내 취향을 뒷전으로 하고 ‘전달자의 역할’을 우선순위에 둔다.

이 공간과 분위기와 언어는 방문객이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반려견 운동장의 이용수칙은 결과적으로 알릴 내용은 비슷하겠지만,

그 문장을 내가 썼는지는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

그건 단순한 ‘정보’를 넘어선, 시간과 마음으로 만든 언어이기 때문이다.


점점 유사업종이 많아졌다.

나 역시 다양한 반려견 공간을 찾아다니는 보호자이기도 하다.

수칙은 돌고 돌았고,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해서 만들던 포토존은 유행처럼 퍼졌다.


그 반복 안에서 내가 들인 수고가 누군가에게는 ‘쇼핑하듯 고른 옵션’이 되는 걸 느꼈을 때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만든 걸 너무 쉽게 가져가는 그 태도 자체가 마음을 건드린 거다.





비 오는 날은 야외공간이 많은 특성상 이용이 불편해지고,

내점 고객 또한 줄어들기 때문에

그걸 보완하기 위해 또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맑은 날에 또다시 방문하세요’의 의미를 담은 반려견 재입장쿠폰을 드리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이름이 바로 “비오케이 데이 (BE OK DAY)”였다.

-비(rain) OK의 의미와

-BE OK의 의미를 담아

우리 공간의 즐거움을 나타낸 행사명이었다.


어느 날 고객님이

그 행사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다른 반려견 운동장이 있다고 하질 않는가.


확인차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며칠 전 비 오는 날에 쓴 피드가 그대로 있었고 포스터배치도 우리가 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분이 확 나빠졌고, 손이 떨렸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마음을 가다듬고 그 피드에 댓글을 남겼다.

직접 고심해서 만든 컨텐츠고, 00 카페에 더 어울리는 행사명이 있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솔직히, 사과 한 마디쯤은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하지만 돌아온 건 피드 삭제.


디자이너나 작가들 이야기인 줄 알았던 감정이 카페에서 일하는 나에게도 벌어진다.

‘저작권 침해는 사실 크나큰 감정침해구나’를 그제야 알았다.


시간이 지나니 솔직히 화난 감정은 희미해졌고,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건 아니지만,

물질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일에 대해 기준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던 걸까.


그러다 문득,

나도 살아오면서 그런 행동을 범하진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어릴 적, 나도 누군가의 글을 아무렇지 않게 옮겨 적고,

예쁜 사진을 출처도 모른 채 핸드폰 배경으로 저장하지 않았던가.

좋으니까 쓰고, 예쁘니까 가져가는 건 줄 알았다.


그렇게 무심히 해온 행동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시간과 마음을 담은 것. 을 너무나도 가볍게 해치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떤 문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지나갔는지

어떤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그려보고 지웠는지 떠올려봤으면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을 열어두기 좋은 날엔, 이런 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