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 400에 36 (3/3)
사람이 사는 데에 무엇이 필요할까? 가로 세로 3미터도 안되는 작은 방을 채우는 데에는 큰 고민이 필요 없었다. 자고, 먹고, 입는 데 필요한 것들만으로 사면이 다 찼으니까. 본가에서 받기로 한 매트리스(요즘 같았으면 접어쓰는 토퍼를 샀을 것 같다)를 제외하고 나는 쥐꼬리만한 통장잔고를 셈해가며 조심스럽게 방을 꾸리기 위한 인터넷 쇼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결제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산은 빤했고 가장 가성비 좋은 선택지들이 검색 상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보관하기 위한 왕자행거 2만원 대, 접이식 의자 1만 2천 원, 가로 세로 1200x600 크기의 조립식 데스크 2만 7천원, 조립식 책장 6만원. 가구들은 감동적일만큼 저렴했다.(*2013년 물가입니다.) 10만원 남짓으로 세간살이 마련을 끝낼 수 있을 줄이야. 사실 내가 구입한 것들의 실체는 설계된 가구라기보다 시트지가 덧대어진 몇 장의 합판과 철제 막대였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람. 고맙습니다. 한국의 중소기업과 택배 회사와 중국의 공장들. 군더더기 없는 블랙 앤 화이트의 합판과 철들을 잘 잘라 내게 보내주어서.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리뷰란은 별 다섯 개 일색이었다. 하기야 누가 불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장미가 기본적인 부엌 살림들은 가지고 왔기 때문에 특별히 더 사야 할 것들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필요없는 물건 두 가지를 더 주문했다. 살풍경한 형광등 불빛 대신 노란 빛으로 방을 밝혀 줄 철제 클램프 스탠드는 전구 포함 2만 2천원이었고, 판매량이 제일 많은 2.0 채널 컴퓨터 스피커도 2만원 남짓이었다. 사실 책장도 책을 들고 나오지 않았으면 필요하지 않았을텐데 집을 나오며 굳이 책을 택배로 부쳤다. 공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겐 그런 사치가 필요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 곁에 두는 사치.
한 달 월급 남짓한 돈은 금방 떨어질 예정이었고 다음 직장도 불투명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저기 이력서를 보내며 급한대로 일일 알바들을 전전했다. 전화 설문조사나 간단한 엑셀 작업, 제품 검수나 행사장 일일 스태프 등의 일들이었다. 소개소의 수수료를 떼고 많으면 8만원 통상 5만원 정도의 일당이 하루 이틀 내로 통장에 들어왔다. 내 일들은 누군가 갑자기 펑크를 낸다거나, 급한 일정이 비집고 들어왔다거나 하는 예외 상황이 있어야만 만들어졌고, 누구라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취급받는 일들이었다. 시장이 보는 나의 쓸모가 딱 그 만큼일 때, 그걸 이 세상에서의 내 존재가치로 착각하고 좌절감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내게도 필요한 것 이상의 것들로 구성된 삶이 필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사치는 내 생활에 더해진 은유의 공간이었다. 합판과 철들을 아늑하게 감싸는. 소확행이라든가, 홍대병 따위로 희화화되는 허영과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 기호들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 이상이었고 생활보다 중요하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목표도 전략도 세우지 못한 채 가끔 곪은 감정을 들여다보는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은유의 세계를 긍정하는 한 오늘을 살아내게 해 줄 낙관과 희망도 사라지지 않으리란 걸 선험적으로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계약하던 날 공인중개사가 건넨 덕담처럼 우리 집을 탈출해야할 곳으로 삼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는 동안 나의 침실 겸 사무실 겸 식당 겸 옷장에 애정을 갖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농담은 즐겁고 음악은 아름답고 음식은 맛있었다. 아주 구체적으로.(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