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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Feb 09. 2022

보통은 이렇게 독립하지 말라고 함

보광동 400에 36 (2/3)

대학졸업 후 1년은 엉망이었다. 알바, 구직, 활동. 하는 건 많은데 되는 건 없고 뭐 하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즉, 돈을 모은 것도 아니었고, 취직을 하지도 못했고, 세상에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라서 문제가 없어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토익 공부, SATT, 대학원, 워킹 홀리데이, 공무원이나 이런 저런 국가고시... 뭐라도 일단 할 건 많았는데, 내 미래는 만사에 부정적인 예측으로 무장하고 현재를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일단 할 수 있는 아무 일보다는 무슨 일이어도 좋으니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실 같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하늘과 땅처럼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이 자리여야만 한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어디라도 좋다는 모호한 마음으로는 아무 자리도 얻을 수 없기 마련이다. 운 좋게 가게 된 몇 번의 언론사 면접에서는 두 번이나 “기자가 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에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아닌데요.” 내가 듣기에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절박해야 하는 처지인데 절박하지 못했다. 그걸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 무지 부끄러웠다. “너 평범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스워 보이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냐?” 어느 날엔가는 아빠에게 그런 말을 듣고 울었다. 하나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너무 대단해 보였다. 잘 먹고 잘 자면서 고작 이런 말에 눈물이 터지고 마는 스스로가, 자기연민이 혐오스러워 계속 눈물이 났다.


내가 집을 나온 무렵은 그런 엉망진창의 1년이 지나고 난 봄 끝자락이었다. 자립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은 대체로 준비가 되면 하라는 것이다. 먼저 취직을 하고 가능하면 부모님 집에 살며 생활비를 아껴 돈을 모아라. 월세를 부담하며 목돈 마련은 어려우니, 전세살이가 가능할 때 자립해라. 전세 보증금 마련 시 청년 대상의 주거비대출지원을 받는다면 본인 자본은 대략 2천~3천만원 정도 모으면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인데, 나도 이 조언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자립의 시작을 그렇게 해야 밑 빠진 독에 물 붓지 않고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모아둔 돈이라고는 두 달치 월급 뿐이었던 때 집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기회는 준비 되지 않은 자에게도 온다. 그럴 땐 일단 기회를 잡고 보라. 아무도 자립에 대해 이런 조언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투룸으로 이사가려 하는데 혹시 함께 살 생각이 있냐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나는 알아서 미래의 나를 믿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 결정에는 함께살자고 제안해 온 장미가 재밌고, 무엇보다 드물게도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인 것도 한 몫 했다. 나는 그다지 깔끔하고 단정치 못한 주제에 남의 시선에는 민감해서 누군가와 내 생활의 민낯을 공유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장미는 그런 것으로 압박을 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친구로서도 내가 나 자신을 농담거리로 삼는다고 후에 얕보거나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제멋대로이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에게는 전통적인 밥상머리 폭탄 고백 스타일로 독립 계획을 밝혔다. “나 독립하려고, 장미랑 같이 살려고 집 계약했어. 3주 후에 이사야.” 식탁 공기가 조금 어색해졌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했네. 돈 벌면 이제 나가 살아야지.” 아빠는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엄마가 걱정 많고 보수적이면서도 겉으로는 개방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보이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의 그런 이중성은 오랫동안 내게 심리적인 제약이 되었고, 집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큰 이유였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걸 미리 계산한 건 아니었지만 약간은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실 집을 나올 수 있었던 건 몇 달 전부터 마케팅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담당자가 사업 종료 기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갑자기 퇴사한 자리에 지인 소개로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어서 단기 알바에 가까웠지만, 수월하고 재미있었다. 아직 네이버 블로그 중심의 바이럴 마케팅이 활발한 때였다. 내가 참여한 사업은 여러 번 재계약한 파트너라 큰 무리없이 계약이 연장될테니 이번 일이 마무리 되어도 계속 함께 일했으면 한다는 분위기였는데, 그 사업이 그만 비딩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들어간 다른 비딩도 줄줄이 떨어져 인력충원은 쉬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계약 종료 일, 즉 퇴사일은 이사 후 일주일 뒤였다.


이사 날, 나는 여행용 캐리어 하나를 들고 집을 나왔다. 옷가지 등등은 택배로 부쳤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공인중개사 뒤를 따라갈 땐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던 지름길 골목에는 한달 새 만개한 목련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아래 적색 벽돌 담벼락에는 흰 라커로 ‘섹스’라고 적혀있었지만. 저런 낙서는 왜 어디에나 있는 걸까? 나는 너무 진부하고 통속적인 장면이 나를 맞이한다고 생각했다. 노란 장판이야 뭐야.


먼저 독립 생활을 시작한 장미는 짐이 꽤 많아서 용달 트럭을 불렀다. 특히 조미료가 엄청나게 많았다. 얼마나 많았냐면 8년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조미료가 남아있을 정도다. 풍성하진 않아도 다양성이 보장된 식사를 할 수 있겠군.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그날 밤 나는 트렁크와 나만 있는 빈 방에서 이불을 만두처럼 접어 몸을 감싸고 잠을 청했다. 이 방이 이제 내 집이야. 삶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전망도 없을 때였다. 일자리 재계약은 이뤄지지 않았고, 일년 간 헌신했던 활동은 “너 처음엔 멀쩡하더니 완전히 망가졌네”라는 모욕의 말을 뒤로한 채 단체를 떠나는 것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온전히 절망할 수 있는 장소를 집으로 삼게 되었다. 너무나 필요한 안식이었다. (계속)


2013년 7월 26일 오후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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