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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희원 Feb 06. 2022

잠깐 살아본다는 게 눈 깜박하니 5년

보광동 400에 36(1/3)

처음 집을 보러 간 날에는 비가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의 예산은 500에 40. 가장 먼저 보러간 집은 반지하였는데 예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본 집은 이슬람 성당 근처 상점가의 2층 건물로, 넓긴 했지만 창문이 거리의 소음을 전혀 막지 못하고 있어 집 답지가 않았다. 난감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중년의 공인중개사는 매물 설명도 제대로 않고 오늘 오전에 다른 좋은 집이 나왔다며 지도에 나와있지도 않을 것 같은 비좁은 골목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여긴 지름길이고 아가씨들은 평소엔 큰 길로 다니면 돼. 나도 우리 딸한테 저녁엔 이 길로 절대 못다니게 해. 근데 급할 땐 이 지름길로 가면 역까지 10분도 안걸리니까 또 좋지.” 작은 장점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그러나 단점도 부질없이 드러나버리는 설명을 들으며 도착한 세 번째 집은 2층짜리 주택의 1층이었는데, 짐도 없고 도배도 새로해서 깔끔했다. 한마디로 이만하면 살 만해 보였다.


“우리 그냥 여기로 하면 어때?” 안 좋은 집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야 진짜 매물을 보여준다는 부동산 관행같은 건 전혀 몰랐던 때였다. 나는 앞으로 이만한 선택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같이 살기로 한 장미를 성급히 부추겼다. 공인중개사도 옆에서 거들었다. 집주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값이 싸게 나왔다. 아가씨들 살기에는 이만한 집이 없다. 터가 좋은 집이라, 이전에 살던 신혼부부도 1년 만에 금새 돈 모아서 근처 빌라 전세로 옮겼다. 아가씨들도 금방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거다... 기타 등등. 해당 사항 없는 덕담을 한 귀로 흘리며 집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단점도 눈에 들어왔다. 큰 방은 왜인지 오각형이고, 모서리에 가스레인지를 우겨넣은 부엌엔 조리대도 없는데다, 아예 열 수 없는 창이 두 개나 나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때. 어둡고 습하고 시끄러운 것에 비하면 이상한 것은 별 흠도 안되었다. 무엇보다 집세가 말도 안되게 쌌다. 500에 35만원이라니. 예산에 맞는 집 중에 반지하나 옥탑이 아닌 방이 있으리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1-2년 머물 거처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날이 개어 작은 방에 햇볕이 들었다. 흰색 합지로 갓 도배한 벽이 온화한 노란 빛을 띄었다.


그 다음 주 우리는 재개발이 시작될 경우 세입자가 곧장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항목이 들어있는 임대차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보광동은 오래 된 재개발 지구였다. 그래서 이렇게 싼 값에 나온 거였다. 언제 재개발로 밀어버릴 지 모르니 집을 고쳐 쓰지도 못하고, 언제 오를 지 모르니 팔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낡아가는 집들을 월세로 주는 거였다. 우리는 그나마도 보증금이 모자라서 400에 36으로 가격을 조정했다. 부동산에서는 앞으로도 5년 간은 재개발은 어림도 없을 거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오래 살 걸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걱정은 없었다. 재개발 정책의 부작용 덕에 한강까지 걸어서 10분,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10분, 서울의 웬만한 도심은 3,40분 내로 갈 수 있는 월세집을 얻다니. 우린 운이 참 좋았다.


잠시 머물 줄 알았던 그 작고 비뚜름한 집에서 장미와 나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만 5년을 살았다. 나는 그 사이에 기본소득 활동을 병행하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삼십대를 맞이했다. 그 시간 내내 보일러도 한 번 얼지 않고, 전기가 나가지도 않고, 비도 새지 않았다. 혼자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방문을 죄다 열어보곤 했지만 누군가 집에 몰래 숨어든 일도 없었다. 우리는 숱한 밤을 각자의 방 문턱에 앉은 채 수다를 떨었다. 직장에 다니는 주인 집 아주머니는 밖에서 만나 인사하면 끝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약간 무서운 인상을 한 주인집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계절 따라 보일러며 조명을 체크해주었다. 서울 한 가운데의 작고 작은 틈새에서 온 세상의 무심함 덕에 무사했던 5년이었다. (계속)

2013년 10월 14일 오전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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