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증과 사유의 사이에서
겨울을 잘 나고 봄이 되면서 감기에 걸렸다. 콧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울증 삽화가 왔다. 며칠 됨. 이유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귀찮다. 그럴만한 무언가가 있었나보지. 징후는 손톱에서부터 온다. 부적절할 정도로 긴 손톱. 아니 언제 또 손톱이 이렇게 길었지? 손톱은 내 몸에 깨진 유리창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 저기 방치 된다. 대충. 대충... 적당히. 아무렇게나. 정신건강 관리에 대해서라면 나는 정말 내가 할만큼 해왔고, 할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을 먹고, 스스로를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작은 성취감과, 감사와, 적절한 신체활동과, 새로운 재미와 자극과...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은 벌어지는 것이다. 소리들이 우스워지고, 만물에 비루한 먼지가 끼고, 머리 속 직관의 스위치가 꺼지고, 목구멍이 무게추를 단 것처럼 묵직해지는. 이것이 감정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바로 인지한 것, 그 역시 할만큼 해온 이 몸의 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지치고 제법 짜증이 나있는 이 목소리는 아마 어떤 실존주의자 꼬마의 것인 것 같다. 걔는 사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나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협업의 공간에서만 에너지를 쓰고 있는 나. 혼자 만의 공간에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그저 누워서 명상 가이딩을 듣거나, 유튜브 쇼츠나 하릴 없이 넘기면서 머리 속을 텅텅 비우고 있는 나에 대해. 죽음에 대해서도, 시간에 대해서도,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인류적 차원의 연민을 버려두고 스스로의 눈치를 끝없이 보며 ‘일할 수 있는 상태’ 유지에 집착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있는,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완고한 꼬마. 완결성은 있지만 대단히 미성숙한.
(아무것도 하지 마. 그리고 거기에 번아웃이란 제목 따위 붙이지 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손톱은 이미 엊그제 깎았다. 오늘은 강아지 목욕을 시키고 투표하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예정이다. 그리고 생각해야지, 여러 곤경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실존주의자 꼬마는 극장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싶겠지만, 난 이제 맥주를 한 캔만 마셔도 잠이 와서 영화를 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여기, 속하지 않은 채로도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친구들과 힘을 합쳐 만들어나가기로 했는데, 거기엔 아마 충분히 고독한 상태를 수용할 수 있는, 그 드문 자질의 꼬마를 위한 공간도 포함되어 있을 거란 걸 이해하고 이제 그만 화냈으면 좋겠다. 멜랑콜리조차 없는 삽화는 정말 구리니까...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새에 대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쌀을 불리고 밥냄새를 풍기고 싶어졌으면 좋겠어. 내일 당장 죽어버려도 좋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열흘 전 우리집에 온 열 두 살 먹은 강아지는 산책을 다녀와 꼬순내를 폴폴 풍기며 자고 있다. 강아지와 가까워질 수록 강아지는 천사가 아니라 동물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우리는 두 동물.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서로 바라는 게 있고, 서로 말이 안통하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한 마리와 한 명. 럭키가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럭키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몰라도 상관없는 것 같다. 무사하고 괜찮으면 됐다.
난 언젠가 반드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승리할 거야. 정치적으로. 시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