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2021

by 해야

작심삼일이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 아무도 안 시켰지만 매일 짧은 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 것을 딱 하루 지켰다. 내 경우엔 작심육십일. 정확히 두 달이 걸렸다. 첫 날 글을 발행하고 드디어 실천이란걸 했다는 감격에 단톡방에 떠들고 싶었지만, '딱 삼일만 지키면 그 때 말하자.'는 마음의 소리가 날 살렸다고 해야할까. 아니, 차라리 입 밖으로 내뱉었으면 이틀이라도 지켰을까.


벌써 2월이란다. 다시 설이란다. 타향살이가 지속될 수록 구정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는데, 올해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듣기 전까지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 2월인데 다시 새해라. 그 말인 즉슨 2021로 숫자가 바뀐 후에도 미적지근하게 매일을 살아내고 있는 나를 점검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일에 무슨 특별한 날이 필요할까만은 천상 게으른 사람은 연말, 새 해 같은 특정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엉덩이와 손을 좀처럼 떼지 않는다. 유투브나 넷플릭스만 주구장창 보다 벌써 올 해 반이 지났다며 올 해 한 것이 없다며 하이킥이나 하겠지. 때마침 한국에 있는 친구와 안부 카톡을 주고받다 폐인처럼 일만 하는 그녀가 다시 새해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말을 듣고 나 역시 오랜만에 의욕이 (아주 작게) 솟아난 참이었다. 그러니 이 게으른 인간은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정신을 차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지난 1월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지난 한 달간 내가 한 일을 시간 순으로 곱씹어보니, 한 달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명확하고 간단하고 필요 이상으로 일관됐다.


술.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셋트로 딸려오는 숙취. 1월이 시작된 첫 주말부터 매주 금요일이나 토요일, 가끔은 금요일과 토요일 모두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음주에 빠져 지냈다. 주말 뿐이랴. 평일에 일이 끝나면 맥주 한 잔, 가끔은 와인 반 병. 어떤 날은 칵테일 한 두 잔. 일이 한가한 어떤 금요일엔 지금 술이 들어가야 머리가 돈다며 일짝부터 맥주 한 캔. 매 주 금요일 출근 도장을 찍던 리쿼 스토어. 이럴 바에 한 열병 싸게 쟁여놓는게 이득인 것 같아 기웃거리던 온라인 와인샵들. 숙취가 심한 체질이라 일 년 중 음주일이 평균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았던 인간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21년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와인에 눈을 뜨고 (그래봤자 와인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고 싸구려 와인만 마시는 형편이지만) 혼술에도 아주 맛을 들여버렸다. 게으른 인간이 지난 한 달 술을 향해서는 참 부지런했다.


다행히 고질적인 숙취들이 항상 주량을 컨트롤해 준 덕에 음주 다음 날까지 통으로 날리는 과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주 꾸준하게 술을 마시는 것은 규칙적으로 운행되던 일상의 패턴을 손쉽게 어긋나게 만들었다. 창작을 위해 꾸준히 해야할 일들은 뒷전으로 밀렸고, 청소나 빨래처럼 일상을 돌보는 일마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까지 방치됐다. 주말 내내 거진 취해 있으니, 조금 쉬다 보면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그런 생활을 한 달 동안 반복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멈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당연 통장 잔고다. 매 주 오만원 정도의 술값이 꾸준히 나갔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늘어난 렌트비와 고정 지출 비용으로 저축이 확연히 줄어든 와중에 새로운 지출 항목이라니. 그것도 술이라니! 그럼 술을 줄일 것이지 식비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하는 인간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그가 자신이 운영하던 바를 정리하고 전업 소설가로 전환할 때 어떻게 생활 방식을 선회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새벽 5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되도록 만나지 않는, 전업 작가로서의 자신에게 가장 맞는 형태로 하루키는 자신의 일상을 수정하고 그것을 수 십년간 지켜간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술 만이 줄 수있는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이 분명 있고, 나는 앞으로도 그 즐거움을 놓고 싶지는 않다. 단, 정신을 차리지 않고 즐거움에만 탐닉하다 일상이 트랙을 이탈해 달리는 중이란걸 눈치챘다면 멈춰야 한다. 최소한 속도를 줄여야 한다. 우선 순위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건, 내 인생에 꽤나 무책임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설 연휴가 끝난 시점이 되어서야 지난 한 달 되돌아보기가 마무리되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포스팅을 끝냈고, 미뤄 두었던 잡다한 일들도 처리한 오늘은 꽤 뿌듯한 날이다. 다시 시작함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어제 사다 둔 맥주를 당장 따고 싶지만, 일단은 조금 더 참아보도록 한다.



술독에 빠져 살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까. 2021년이 되는 순간 화면에 건배하는 나...

(참고로 가장 아끼는 저 잔은 고영희님에 의해 얼마 전 운명하셨다.)

매거진의 이전글옥상에서 노을을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