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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현 Jul 12. 2019

6. 발행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저는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잘 풀리질 않네요. 이론만 공부하는 건 공부에 좋지 않다는 생각에 가끔 창작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에는 정해진 형식이 있습니다. 보통 교수님이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강생의 작품에 대한 동료들의 코멘트가 시작됩니다. 대부분 좋은 이야기는 없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면 멘탈이 너덜너덜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흔히 말하는 '아무 말 대잔치'입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무 말을 합니다. 골라 듣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수업에서는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배웁니다. 문학의 언어는 정제된 언어이고, 일상 언어로부터 균열을 일으키며 예술의 미덕을 가지게 된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필연적으로 아무 말을 하게 됩니다. 마치 지금처럼요.


원본은 '자기 전에 쉬했나요?' 라고 합니다. 저작권은 원 저자에게 있습니다만 짤방이 그렇듯 영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말합니다. 정확히는 내뱉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된다고 배웁니다. 맞춤법도 지켜야하고 지킬 게 많습니다. 문학 수업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입을 닫고 있으면 교수님들에게 '요즘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배운다고 생각하지'를 듣게 됩니다. 모든 교수님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한국 사람들은 질문에 인색한 편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닥치고 있으면 절반은 간다 배웠으니까요.


글을 쓰다보면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초고는 늘 와장창 내가 아는 걸 다 때려넣은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하루이틀만 지나도 이불킥할 일이 생깁니다. 아니 뻐킹 이걸 내가 문장이라고 썼나, 진짜 아무말 했네, 그러다보면 쓰는 게 두려워집니다. 쓰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쓰지 않는 인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필요한 글만 쓰게 됩니다. 보고서도 써야하고, 결재본문도 써야하고, 시말서도 써야하고, 아 그보다 앞서 자소서도 써야하고, 솎아내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보통 말하기와 쓰기는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의 첫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을 행동(말하기/쓰기)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말과 글은 출발이 아주 쉬운 도구이고, 그것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사용의 유의점을 배웁니다. 철학이나 정신분석이나 대부분의 인문에서 '말'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연재의 목적은 아니기에 생략하도록 합니다.


출처는 이윤창 선생의 <좀비딸>입니다. 주인공 애용이는 사람 말을 하지만 사람들은 애용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주인공이 애용이라는 건 구라입니다만 사실 저는 주인공이 애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이것을 '독해의 방법을 달리해보기'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교육을 착실하게 수행한 학생들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작품을 독해할 때 정답이 있는 것으로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이윤창 선생은 천재입니다. 이만 총총.


따라서 사람들은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주제가 확실한 글을 쓰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말은 곧 약속인데, 약속을 지키는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우리의 상상력은 줄어듭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저의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인데요, 아무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 속에 있는 '인간답게 말하기' 장치가 저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주술호응이 명확하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비교적 잘 지키면서 말하는 것. 전공자로서 맥락에 맞게 말하기. 이게 줄여서 '인간장치'가 저를 통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원석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은 사실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상상력이라고 합시다. 상상력은 이렇게 논리적으로 흘러가는 동안 온갖 정보들을 불러옵니다. 저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미지입니다. 반려묘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그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산티아고의 발걸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발걸음을 생각하다보면 자세를 고쳐 앉게 됩니다. 자세와 발걸음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컵에 커피가 없네요. 콜라라도 마시고 싶습니다. 카페인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고양이는 귀엽습니다. 이 분의 존함은 '우리'입니다. 귀엽다는 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가 되는 건 고양이 같은 귀여운 것들 뿐입니다. 인간을 용서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연재까지 이제 6회차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100회차 연재를 기획했으니 이제 막 5%를 지난 셈입니다. 나쁜 생각을 말한다고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이 정도는 나쁜 생각 축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나쁜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그리고 정말 나쁜 놈들이 나쁜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쁘다는 것조차 잊고 있으며, 정말 나쁜 경우에는 합리화합니다. 


제일 악질인 경우가 나쁜 생각을 합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쁜 놈들을 재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일부 정치인 따위가 있겠네요. 해외에서는 정치(Politics)를 두고 농담을 하는데요, 많은(Poli) 진드기(Tics)라는 거죠. 베를루스코니 같은 사람이 있겠네요. 다른 유명인으로는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있겠네요. 국내 정치는 뭐,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늘 에스코바르를 떠올리면 베네치오 델 토로가 생각납니다. 넷플릭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바그네르 모라를 떠올리겠지만요. 간지나게 그려져서 그렇지 원래 에스코바르는 개갞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콜롬비아를 생지옥으로 만들었죠. 물론 메데인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에스코바르가 돈을 뿌리지 않았다면 그를 사랑했을까요?


그럼 생각하는 것을 전부 말하는 것은 나쁜가 하는 문제로 돌아갑니다. 처음 말했던 것처럼 생각을 처벌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 문장은 많은 뜻을 갖게 되는데요, '생각하는 것을 처벌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있겠죠. 독심술이 개발되지 않았으니까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처벌하는 나라'를 생각해봅시다. 


대부분의 현대국가는 법치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어떤 약속을 하고, 그 약속(법)에 따라 약속을 어긴 사람들을 처벌하는 거죠. 그러면 생각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러한 나라는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 됩니다. 또 '나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IS 같은 애들은 자기들이 '이슬람국가'를 설립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예로 중국, 대만,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은 서로의 판단에 따라 말이 많습니다. 한국과 북한은 서로를 '정상국가'로 인정하지 않죠.


어쨌거나 '나라'라는 것에도 이렇게 많은 논쟁거리가 생깁니다. '처벌'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생각에 따른 처벌은 민감한 문제인데, '검열'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나라들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이 자유에는 생각의 자유 또한 포함될 것입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자유는 보장됩니다. 그러나 다시, 이 '자유'는 '제한된 자유'입니다. 타인의 재산권, 인권 등 권리를 법적인 차원에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서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이곳은 엠폴리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대저택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데, 관광객은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엠폴리는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니라 와인 생산과 공업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엠폴리 토박이이자 오랜 친구인 레오가 이곳을 안내해줍니다.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는 성당이 있어서, 일반 시민들도 성당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미사 때마다 2층에 앉아, 일반 시민들을 내려다보며 그들과 분리된 상태로 기도했습니다. 레오는 말합니다. "메디치 새끼들은 하이고, 평민놈들 개떼처럼 몰려왔네, 하면서 기도했겠지?" 우리는 웃습니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아들이 끊겨 멸문했습니다.


'자유'라는 단어조차 그 뜻을 생각해보면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떨까요. 생각은 보통 언어로 정제된 상태로 출력된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가끔 말합니다. "엄마, 노을이 무지개색이야!" 이건 실제로 들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노을을 붉은색, 주황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무지개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제된 말에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이런 상상력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유럽이나 북미 사람들은 메타포를 많이 사용합니다. 비유를 많이 쓴다는 말인데요, 예를 들어 비가 억수로 내린다는 말을 '레인 캣츠 앤 독스'라고 합니다. 이건 어원이 분명하지 않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이 늑대나 고양이에 비유되어서, 비가 많이 오는 일은 신들의 뜻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비가 많이 오면 고양이나 개들이 홍수에 떠내려가는 게 일상이어서 그랬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어원을 생각해보면 원래 한국어에도 이런 말이 많습니다. 근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네요. 넘어갑시다.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는 목이 잘린 석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야, 레오, 대가리 좀 얹어보렴." 낄낄거리며 시키는 것처럼 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이들은 해당 국가의 석상에서 목을 잘라버리는 일에 익숙합니다. 태국이나 라오스에도 비슷한 불상이 많습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모가지를 따는 것에서 그들의 믿음을 꺾고, 그들에게 승리했고, 그들을 복속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문명시대 이후로 상징에 익숙한 동물이었습니다.


글은 늘 불온했습니다.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상 수많은 금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서들이 세상을 바꾸어왔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대표적이었죠. 갈릴레오 갈릴레이부터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의심을 말하는 것은 때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사회에 혼란과 분열을 일으킨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글이 예술의 영역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이 '상징'도 문제가 됩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그랬습니다. 감히 지옥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다니 ㅂㄷㅂㄷ... 프랑스 사람들은 경악하며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살로메」의 오스카 와일드는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동성애가 그 이유였지만, 「살로메」는 주인공이 부도덕하다며 상영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죠. 유럽이 문명의 출발이라 여기는 그리스 시대만 하더라도 동성애는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이게 다 믿음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글쓰기와 읽기를 배우는 과에서도 '어떻게 잘라내느냐'를 먼저 배웁니다. 그리고 말과 글은 생각을 담는다는 점에서, 조심히 사용해야 될 어떤 것으로 신성화됩니다. 모든 작가와 교수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언어의 예술적인 사용은 '믿음'처럼 간주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일수록 혹독한 평가를 받곤 합니다.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견고한 성 안에서 소비되고, 재생산됩니다. 작가들조차 '글'이 '그들만의 리그'에 있다고 인정하는 상황이 도래했죠.


물론 문학계에서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해서 이런 책도 나왔죠. 저는 장강명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제가 일하고 있을 때면 가끔 업무를 보러 오셔서 늘 커피를 사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유명하신 작가이지만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시고 매우 예의있게 대해주셨습니다. 사석에서의 선생님은 잘 모릅니다만 어쨌거나, 이런 책도 나오는 게 문학판입니다. 많이 팔렸으면 좋겠습니다만 문학청년들이 사서 보겠죠. 슬픈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 많이 팔렸다면 좋은 일입니다.

이 글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사적이고, 문학적이지 않은 편에 속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이럴 시간에 제대로 된 글을 더 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학원 씩이나 공부해서 뭐 하는 짓이냐, 왜 시간을 버리고 있느냐, 이럴지도 모릅니다. 제게는 이런 작업이 훈련입니다. 누가 읽는지, 누가 읽을지도 모를 공간에, 혹 운이 좋아 작가가 된다면 훗날 공격이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자료들을 남긴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라고 생각되는 편입니다. 따라서 이 글들은 대체로 나쁜 편에 속합니다. 응원하는 동료들은 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계속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지켜간다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은 언제나 이러한 규칙,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내가 완벽히 생각과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삐를 조금이나마 풀어두기 위해 나의 생각을 풀어놓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건 일종의 싸움입니다. 이럴 시간에 자소서를 더 써야해! 라고 외치는 이성과, 네가 아직 시인이 되지 않고도 이럴 시간이 있냐! 라는 이성과,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제된 글을 써야지! 라는 이성이 나를 줘 팹니다. 조선어 패치에 5000만원을 투자했다는 것도 나를 팹니다. 거기다 거의 대부분이 빚이라는 사실도 나를 패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버티면서, 그 버팀의 기록을 남기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사적(私的)이고, 사적(史的)입니다. 


위 그림은 부르고스 미술관의 <인류의 기원, 상형 예술(Origin of Humanity, Hip Art)> 전시에서 외부에 설치된 작품입니다. 앞으로 걷는지 뒤로 걷는지 알 수 없고, 정체도 분명하지 않은 생물이 길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가 처음 예술적 행위를 시작하게 된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설명은 개 뻥입니다. 순례길 벤치에 그려진 낙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명을 들었을 때 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예술이 이렇습니다. 작품 자체보다는 해설이 더 중요해졌죠. 얼마냐 그럴싸하냐, 이게 승패를 좌우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압축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시가 될 겁니다. 대체적으로 제가 연재하는 글들은 제가 쓰는 시의 흐름(Flow)을 따르고 있습니다. 개소리에서 개소리로 이어지는 편입니다. 시는 보통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극에서 창작자가 의도한 바와는 다른 의미를 생성하게 됩니다. 해석의 지연 사이에 다른 해석이 생성되는 셈인데요, 무튼 저는 그걸 늘 실패하고 있어서인지 아직 데뷔하지 못했습니다. 이 글들이 시적이라고 생각하냐고요?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 질문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써놓은 글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서 시를 쓸 수 있거든요. 해서 이 연재들은 긴 시작(詩作)노트이기도 합니다. 누가 훔쳐가면 뭐 어쩔 수 없죠. 그건 그 시인의 요령이니까요. 물론 훔쳐갈 사람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정리하자면 글을 쓰는 누구나 '인간장치'에게 단속을 당합니다. 이 인간장치는 문학의 형식을 가질 수도 있고, 일상언어의 형식을 가질 수도 있고, 브런치의 형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꾸만 상상력이 갈려 나갈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생각을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는 겁니다. 모두에게는 모두의 상상력과 모두의 언어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브런치의 글들 중 제가 링크를 보내줘서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른 브런치 유저들이 글을 읽게 되겠죠. 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저처럼 새벽을 활용해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개소리를 좋아합니다. 개도 좋아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고양이가 되고 싶습니다. 고양이는 귀여우니까요. 개는 가끔 무섭습니다. 반대의 경우로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만 그럼 귀여운 개로 태어나시면 되겠습니다. 욕처럼 들린다면 기분 탓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저는 적어도 이 연재를 쓰고 있을 때는 백스페이스를 누르지 않는 편입니다. 문단 나누기를 할 때나 조정하는 편입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니까요. 물론 이 의식은 대부분 정제된 상태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무용한 생산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컴퓨터의 글쓰기는 너무나 그것을 지우기 쉽게 되어 있다는 것, 해서 우리가 자꾸 스스로를, 스스로의 생각을 잘라내는데 익숙해진 상태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우지 않는 방식을 다들 연습했으면 합니다. 말이 좀 많으면 어떱니까. 말이 없어도 타인이 타인을 읽는데 인색하고, 읽지 않는 세상인데. 그러면 좀 많이 적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여기서의 적어도는 Write 입니다. At least가 아닙니다. 지우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를 지우고 '우리'가 되는데 익숙해지면 나쁜놈들이 우리를 지우는 방식에 익숙해질 겁니다. 메데인 사람들처럼. 아니면 나치 독일에 순응했던 사람들처럼. 좀 더 개별적인 존재들로, 개별적인 발화와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개인적인 말하기와 쓰기와와 상상력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풍부해질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열심히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적겠습니다. 이만 총총. 오타가 가끔 발생하는 건 브런치 글쓰기 시스템이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귀찮으니 그냥 두기로 합니다. 세상에 잘못된 일이 얼마나 많은디... 작은 일에 화내지 않기로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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