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이 뭐라고 10 (終)

라오스 영주권을 따기 위한 처절한 사투

by Xay 싸이

역시 캄판 선생님의 지인 찬스는 통하지 않았고, 서류를 최종 접수한 작년 10월 말로부터 4개월쯤 지난 올 3월 초쯤에 결혼영주심사과에 문의전화를 한 통 넣었으나 "다 되면 우리가 전화 주겠다"는 차가운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작년에 새로 낸 비자가 만료되는 11월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뭐 나도 잊어먹고 기다리는 수밖에. 6개월이 경과한 5월 초에도 전화를 한 번 더 했으나 "다 되면 진짜 우리가 연락할 테니 자꾸 전화 안 해도 된다"는 더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다. 천 밧 준 게 뼈저리게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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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7월 11일, 드디어 030 507 1623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려 서류 접수 후 9개월 만에!!! 이제 내부 검토는 다 끝났고 사진 7매를 가져다주면 최종승인서류를 만들어주겠단다. 아니 뭘 아직도 더 해야 한다고? 반가움과 갑갑함이 쌍어퍼컷을 후려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엉겁결에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아니 사진 보내기만 하는 거면 내가 안 가도 되지 않나. 퀵으로 보내도 되냐 물어보려 도로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매몰찬 자 같으니.


전화를 받은 건 금요일 오후, 지금 급히 가봤자 퇴근하고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완숙떤랭 크 완사오너이 ວັນສຸກຕອນແລງຄືວັນເສົານ້ອຍ라고 "금요일 오후는 작은 토요일"이란 말이 아예 있을 정도로, 금요일 오후에 관공서를 찾는 것만큼 바보짓이 없다. 월요일 오전에는 회의가 많기 때문에 또 피해야 하고(주말에 실컷 달려서 늦게 출근하고는 회의 핑계를 대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화수목 10~11시, 2~3시 정도가 가장 공무 보기 안전한 시간대다.


14일 월요일 2시에 사진과 함께 수수료 370만 낍을 납부했다. 공식수수료 여태 낸 게 5만~40만 낍 정도인 거에 비해 큰돈을 내라는 거 보니 이제 진짜 다 돼가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온 게 화요일 오후. 엇, 이번엔 빠르네? 수요일 오전에 갔더니 이렇게 서류 세 세트를 내준다.

신청자 보관용 : 공안부 장관의 외국인 영주 허가서 원본 및 외교부 영사국, 공안부 호적관리국에 보내는 통지문 사본 각 1부

외교부 영사국 행 : 이 영주권의 신청 당사자는 나지만 서류상 공안부에 최종적으로 요청한 건 외교부 영사국이므로, 이에 대한 처리 결과를 답신 형식의 공문으로

공안부 호적관리국 행 : 이제 이 장관의 영주 허가서를 근거로 해서 신청 당사자에게 호적부 등을 발급해 주라는 통지문

물론 각 부서로 서류를 배달하는 건 여전히 신청자의 일이다.

64cb1281-b8af-4bb3-9ccb-72ab0c6825f6.jpg 전화번호부가 이 얇은 서류봉투 3개로 변신하는 데 9개월이 걸렸다.

전화번호부만 했던 내 영주권 신청서류뭉치는 이제 결혼영주심사과의 캐비닛 깊숙한 곳에서 영원히 잠들겠구나. 부디 습기 안 차는 좋은 자리 차지하고 영면하시길~


서류를 받자마자 영사국에 서류를 배달했다. 오후에는 호적관리국에 배달하고 호적부 발급신청서류를 받아왔다. 담당자가 싹싹하게 굴길래 서식값 5만 낍이라는데 10만 낍짜리를 내며 잔돈 필요 없어를 시전했다. 호적부 발급신청서류를 바로 적어 내려고 했더니 적을 분량이 꽤 되길래 그냥 집에 가져와서 적었다. 내용을 대강 채워 다음날 갖다 주니 부족한 부분들은 담당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준다. 이제 2주만 있으면 호적부와 외국인등록증이 나온단다. 왓츠앱 번호를 주며 호적부 나오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친절히 응대하기에, 나도 나오는 길에 One Pay 앱으로 50만 낍을 친절히 이체해 주었다. 이체 화면을 캡처해서 왓츠앱으로 보내줬더니 득달같이 전화가 와서 고맙긴 한데, 자기 계좌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 계좌로 보낸 게 아니라 니 전화번호로 보낸 거다. 은행에 등록된 전화번호면 계좌 몰라도 이체할 수 있다니 신세계라면서 오오~ 땡큐베리머치 한다. 잠시 후 또 전화가 와서는 계좌로 들어갔더니 돈이 없는데? 라신다. ㅎㅎ 귀여븐 자슥. 니 정식 계좌가 아니라 월렛이라고 충전식으로 쓰는 메뉴로 들어가면 보일 것이다. 오오~ 컵짜이컵짜이~

deptofsammano.png 공안부 호적관리국. 쓸데없이 위압적인 외용이다. 계단 오르느라 땀 삐질삐질....

50만 낍의 효과는 직빵이었다. 2주 만에 나온다던 호적부는 딱 7일 만에 발급되었다. 외국인등록증은 지금 시스템을 수기에서 전산시스템으로 바꾸는 중이라고, 되는대로 바로 연락 주겠단다.


호적부 발급사실을 시 공안국 호적관리과에 통지하는 공문도 함께 나왔는데, 물론 배달은 민원인의 숭고한 임무다. 이 배달을 내가 안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런 일에 굳이 창의성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징글징글한 시 공안국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지만, 이번엔 그나마 과가 다르다. 이전에 나를 골탕 먹였던 건 외국인관리과, 이번에 가야 하는 곳은 호적관리과.


호적관리과를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약간 슬픈 표정의 담당자가 시니컬하게 응대한다. 내가-비록-이런-자리에-앉아-부도덕한-뽀찌를-뜯고-있긴-하지만-나는-원래-고귀한-인간이었어 풍의 눈빛을 하고 있다.


"서류를 여기 갖다 주기만 하면 끝이라던데?"

"아니 갖다 주기만 하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니 서류를 검토해서 또 구로 내려보내는 서류를 만들어 줘야 끝나는 거지."

"아 그러면 니가 그 서류를 만드는 데 더 필요한 것들이 있어?"

"호적부 컬러복사본, 사진 2장, 그리고 수수료."

"수수료는 얼마야?"

"40만 낍"


원래 수수료가 40만 낍도 아닐 것 같았지만, 흔들리며 외면하는 눈빛이 왠지 처연해 그냥 50만 낍을 주면서 되는대로 연락 주세요 하고 나왔다.


2주 후 8월 중순쯤에 처연한 눈빛의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류를 받아다 구 공안과로 갖다 주었다. 시에서 구로 내려왔으니 구에서 동으로도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구 공안과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구에서 받은 걸로 끝이고, 동사무소에는 알리든 말든 옵션이란다. 뭐 어차피 이 모든 일의 시작을 동사무소에서 했으니 일이 끝났다는 것도 가서 알려주지 싶어 호적부 복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 나이반한테 갖다 줬다. 2년이나 걸렸다며 툴툴댔더니 나이반이 "아니, 나 공안부에 아는 사람 있는데 걔 통하면 빨랐을 텐데" 한다. 아니 그런 이야기는 빨리빨리 하라고. 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도 아니고 이런 경우에 뭐라고 하더라.


호적관리국에 다시 연락해서 시-구-동까지 다 호적취득사실을 전파했음을 알리고 외국인등록증은 언제 해줄 거냐 물었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될 거라며, 자기가 꼭 연락 주겠단다. 그래 50만 낍의 힘을 믿어 보기로 하자.


2025년 10월


믿는 도끼는 꼭 발등을 찍는다. 11월이면 또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데, 아직도 외국인 등록증이 없으면 어떡하나. 논문과 번역으로 폭룡적인 9~10월을 보내다 불현듯 위기감이 들었다. 설마 올해 또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거? 호적관리국의 싹싹맨에게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다. "나 담달 초에 비자 만료인데.... 외국인등록증은 아직이야?" 화들짝 놀랐는지 바로 전화를 걸어와 자기가 깜빡하고 까먹었다며, 바로 준비해서 부르겠단다. ㅎㅎ 솔직해서 좋다.

24일 금요일에 연락했는데, 27일 월요일 오후에 전화 와서 이제 다 준비되었다고, 아무 때나 오면 된다고 한다. 28일 오전에 가서 열손가락 지문을 등록하고 사진 찍고 키랑 몸무게 재고(몸무게가 늘었다ㅠㅜ) 시스템에 인적사항 입력하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났다. 한 20분 기다려 따끈따끈 인쇄되어 나온 외국인등록증을 받았다. 수수료는 40만 낍. 이제 진짜 마지막이기도 하고, 오히려 싹싹맨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작년에 받아 둔 비자 기한을 최대한 써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럭키한 일이라 20만을 더 붙여 주었다. 싹싹한 싹싹맨은 씨익 웃으며 1층까지 따라 내려와 인사한다.


"쏙디더, 미냥꺼토하더. (굿럭~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렇게 영주권자가 되었다. 외국인등록증 유효기간인 5년 동안 비자가 면제된다는 것 말고는(5년마다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한다) 영주권으로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부동산을 사거나 할 수도 없다. 출입국 시, 쓸데없이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출입국신고서를 안 적어도 되는 것 정도가 가장 체감하기 쉬운 혜택이라 한다.

라오스 영주권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어 보이는 행정절차와 일일이 싸우고(대부분은 철저히 발리고), 절차의 절차마다 뇌물을 주니 마니 눈치게임을 벌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초탈할 수 있는 평정심을 얻었을 즈음에 주어지는 작은 증표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2년이 훌쩍 넘어가는 이 영주권 쟁취 투쟁을 통해, 불교의 나라 라오스에서 성불에 한 발짝만큼 다가섰다. 옴 마니 파드메 훔~

idcard.jpg 혼자 달랑 올라 있는 외국인호적부와 외국인등록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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