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것만큼 선명한 하지 않는 것
저는 요즘 문단을, 때로는 글 전체를 전복시키는 단어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바구니의 가장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오랫동안 있었는데, 얼마 전 더 마법같은 단어와 마주쳤습니다. ‘하긴’입니다. 종종 한숨이나 조소와 손 잡고 나타나는 이 단어는 불도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다시 한 번 구질구질한 논리를 주섬주섬 꺼내려고 할 때, ‘하긴’은 복잡한 전제를 담백하게 묵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하긴’이 나오지 않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남이야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적어도 제 자신에게는 ‘하긴’으로 자위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저를 더 잘 설명한다고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did’로 기억되지만, 저는 요즘 다른 이들의 ‘didn’t 혹은 have never’이 궁금합니다.
며칠 전에 읽은 <아무튼, 술> (김혼비 저)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술 친구였다.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당신이 결코 농담의 소재로 고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 거의 설득당했지만, 그럼에도 ‘하긴’으로 묵인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편리하거나, 더 싸거나, 때때로 오히려 더 선호하기까지 하지만, 그저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 있습니까?
cover image: Photo by Charlota Blunarov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