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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Oct 30. 2023

술, 네 정체가 궁금해!

술아, 안녕?

그래. 너!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여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너 말이야! 왜? 뒷골목으로 밀려난 너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 놀랐니? 맞아. 사실 나도 널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아마 이 일이 없었다면 난 평생 널 부를 일이 없었을 거야.



얼마 전 내게 미션이 하나 생겼거든. 아주 어여쁘신 작가님께서 매주 글감을 하나씩 내리면서 거기에 대한 글을 써오라고 하시는데, 난 그 순간이 되면 마음이 콩닥콩닥거려. 제발 내가 쓸만한 글감이길 기대하면서 말이야. 근데 이번 주 글감이 바로 너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난 앞이 캄캄해졌어.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기에는 마음에 부담이 커서 술, 술, 술 하면서 머릿속에 너를 떠올리며 불러 본 거야.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난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아. 그래서 풀어낼 경험도 없고 너에 대한 관심 또한 전혀 없어. 우리 집안은 대대로 술을 못 마시는 집안이야. 네가 식도를 타고 넘어와 위장에 자리 잡았을 때 널 이길 수 있는 유전자가 없나 봐. 가족들 모두 부끄러워 얼굴이 불타오르는 걸 보니 말이야. 우리같은 사람들만 있다면 넌 벌써 세상에서 사라졌을 텐데... 하지만 넌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고 아마 먼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겠지?

 


갑자기 너의 가치와 존재 이유가 궁금해졌어. 사람들은 왜 너를 곁에 두고 싶어 할까? 내가 알기로 넌 사람들과 친구처럼 잘 지내다가도 확 돌변해서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결국은 망쳐버리게도 하더라구. 어때? 내 말이 맞지? 얼마 전 길바닥에서 대낮부터 대자로 드러누워 주무시던 그 아저씨도 네가 그런 거잖아. 아니, 억울하다구? 넌 늘 한결같은데 사람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라구? 길바닥의 그분도 ‘딱 한 잔만’ 하길래 친구가 되어 줬는데 스스로 약속을 어기고 들이부은 거라구?

 


뭐, 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내 주위엔 널 평생 동안 함께 할 동반자처럼 여기면서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더라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너부터 찾으면서 말이야. 그 사람들 말로는 너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대. 어떤 이는 널 마시면 ‘붕’ 뜨는 것 같다고도 하던데 내가 그 느낌을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궁금하면 직접 마셔보면 된다구?

아까 말했잖아. 난 술 못 마셔.

처음엔 다 그러니까 한번 시작해 보라구? 난 아직 네 정체도 모르는데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 정체를 모르니까 알려면 마셔야 된다구? 그거 어째 말이 되는 것 같다. 음... 나에겐 술 권하는 친구도 있고 하니 시험 삼아 한번 마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아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난 어제 오후 늦게 술을 마시고 있었잖아. 근데 일어나니 오늘 아침이야!!! 내가 갑자기 잠들어 버렸다구? 가만, 기억 좀 떠올려 보자.

어제 난 맥주 한 캔을 사 와서 그걸 유리컵에 부었어. 뽀글거리는 거품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거품부터 들이켰지. 아무 느낌이 없더라. 거품은 거품인가 생각하면서 꼴깍꼴깍 한 모금씩 목구멍으로 흘려보냈어. 맛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시원하다는 느낌은 있었어.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마셔봤지. 잠시 후 ‘배만 부르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어. 그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된 거야.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진정하려고 의자에 잠깐 앉았는데 그 뒤로 기억이 하나도 없어.

 


아직도 내가 왜 잠든 건지 모르겠어. 설마 네가 날 재운 건 아니겠지?

어쨌거나 네 정체를 밝혀보려는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너 지금 섭섭한 건 아니지? 아니면 안도하고 있는 건가?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잖아. 이 말을 나와 너 사이에 적용해야 할 것 같아. 어쩌면 이번 한 번으로 너에 대해 알려고 한 것 자체가 무모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 먹고 놔둔 빈 맥주캔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보니 언제든 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 같아. 당장은 부끄러워서 너에게 달려가진 못하겠지만 언젠가 내가 널 다시 찾을 때 날 잊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반겨주길 바래.



-2022년 6월의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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