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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 Feb 21. 2021

설경: 여수 가는 길과 리옹 가는 길


여수에서 1년 반 정도 살다가 지난 1월 말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시 돌아온 서울 우리 동네는 나 없는 1년 반 사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가게들이 많이 바뀌었다. 취업 준비할 때 자소서를 쓰러 갔던 카페는 빵집으로 바뀌어 있었고, 뭐가 있었는지도 기억 안나는 가게는 아이스크림 할인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게뿐만이 아니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못보던 벤치가 생겼는데, 벤치에 전열선이 깔려있어 따뜻한 건 여수와 똑같았지만 세련미는 급이 다르게 높았다. (나는 버스정류장 벤치가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여수에서 처음 알았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건가 싶었다.


 이렇게 서울로 오니 도시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바로 바닷가이다. 여수에서 살 때에는 집에서 5분 거리에 바닷가가 있어서 산책을 많이 했는데 서울에서는 바다를 구경할 수 없으니 아쉬웠다.


 여수의 바다는 탁 트인 동해바다와는 다르다. 다녔던 직장도, 내가 살던 집도 도로 하나를 경계로 바로 바닷가와 맞닿아 있었는데, 반짝이는 예쁜 바다에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떠 있어서 아름다운(麗) 물(水)이라는 여수(麗水)의 의미를 눈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바닷가 옆 산책길을 누구보다 열심히 걸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기억이 나, 요즘 내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기 위해 당일치기로 여수에 갔다 왔다.


 서울-여수를 왕복할 때에는 비행기를 자주 이용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비행기 가격이 비싸 KTX를 이용했으나, 코로나 이후 비행기 가격이 많이 낮아져 오히려 공항까지 택시비를 고려하더라도 비행기가 더 저렴하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하여 45분~50분의 비행 후 여수에 도착하는데, 그 시간동안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가 지나가는 땅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직장에 다닐 때에는 서울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힘들어 빨리 타고 내리기 위해 무조건 앞자리 복도 쪽 좌석만을 고집했는데, 사표 내고 난 후에는 그렇게 빨리 타고 내릴 필요 있나 싶어서 창가 쪽에 앉아 천천히 창밖을 구경하고 다녔다. 이번에도 창가 자리를 구입해 창밖을 구경했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하고 나니 창 밖으로 수도권이 한눈에 보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큰 도시에 살고 있구나 감탄한다. 전쟁 후 폐허에서 어떻게 이렇게 큰 도시로 성장했는지 생각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내가 구경하기 좋아하는 곳인 전라도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산악이 70%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평야가 많다는 전라도 상공을 날며 유심하게 살펴보면, 마치 모래사장 위에 작은 모래산을 쌓은 듯 땅 위에 굽이굽이 있는 조그마한 산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사는 평지가 보인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마치 고기 뼈에 달라붙은 살을 남김없이 발라 먹는 듯 야무지게 평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 처럼 보여 재미있게 느껴진다.


 며칠 전 이 근방에 눈이 내렸나 본지 이번 비행에서는 산과 평지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반사시켜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개간된 수많은 평지의 논에 눈이 내리고 나니, 마치 규칙적인 얼음 결정처럼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전라도 지역에 쌓인 눈은 기차여행에서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상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처음이라 더 감흥이 깊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들은 출장 가는 중인가 본지, 이런 경치를 즐기지 못하고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수 가는 비행기에서 눈 내린 풍경을 보면서 유럽 여행 중 기찻길에서 눈 내린 창 밖 풍경을 본 기억이 났다. 프랑스 파리에서 리옹으로 향하는 열차였는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TGV 창밖 풍경엔 뭉글뭉글한 언덕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여행 전날과 당일 모두 눈이 계속 내리고 있어서 창밖은 꽤 어둑어둑했지만 언덕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는 경치는 오히려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내게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런 풍경을 태어나서 처음 봤기 때문에 한동안 넋 놓고 바라봤다.


 여수 가는 길 그리고 리옹 가는 길, 모두 같은 설경이라는 접점이 있지만 그날의 날씨, 이용한 교통수단, 다른 문화에 따라 서로 매력으로 내 기억에 남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기억들 별 것 아닐 수도 있. 하지만 조금씩 추억이 쌓이고 내 안에서 풍성해져 촘촘한 기억의 그물을 만들게 되면, 힘들어하는 내가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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