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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 Jan 13. 2021

책장에 둔 기억의 조각


 복학 후 들었던 글쓰기 교양수업 종강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수님께서는 책을 읽지 않더라도 몇 권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셨지만 그 이유가 마음에 와 닿았다는 감정만 남았을 뿐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샌가부터 바쁘던 일이 끝나면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서 온갖 것들을 구다보시는 아버지처럼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요로코롬 구다 본다. 요로코롬 구다보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권씩 사고, 그렇게 한 권 한 권 모은 게 이제야 책장 한 줄을 채웠다.     



 이 책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대여섯 권은 앞부분 조금만 읽어본 것 같다. 특히 상식을 쌓으려고 샀던 중국 고전은 앞부분만 읽고 훗날을 기약했다. 지금 책장을 보며 기억을 떠 올려 보면, 아마도 저자가 여러 고전을 간추리는 과정에서 너무 생략한 나머지 내용이 어려워진 거라고 애써 합리화했던 것 같다.     



 나란히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보면  전공과 관련된 이공계 서적은 별로 없다. 그나마 뇌 과학 관련 책이 하나 있으나, 이마저도 티베트 승려와 뇌 과학자의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전공 관련 책으로 양자역학에 관련된 책을 하나 사서 꽂아두면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멋짐동시에 빛을 발하겠지만, 벤저스 영화에서 미지의 기술에 대해 양자역학이라 이름 붙이는 것까지만 멋있어 보일 뿐 더 이상 친해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책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은 책은 시집이다. 시집인데도 책장에서 제일 두껍고, 제목도 가장 길다. 책의 제목은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로, 일본 문학의 한 장르인 하이쿠를 번역해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힘들 때 책 속에서 하이쿠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그 위로는 다른 게 아니라 한 줄의 하이쿠를 읽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마주 보는 것이었다.



 책장에는 만화책도 있다. 대학 1학년 때 가장 많이 읽었던 ‘의룡’이라는 만화책 중 한 권을 중고 책방에서 구해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가고 싶었던 의대에 못 가서 그 대신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이 책을 통해 진정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한 적이 있다. 이 만화에서 기억에 남는 건 진심으로 환자의 QOL(Quality of Life)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의사의 모습이었다. 사고 구조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목숨뿐을 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삶도 구하려는 진정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책장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을 보니 그 책들을 샀을 때의 기억들이 난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쩌면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일부를 책이라는 형태로 투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머릿속에서는 잊혔을지 몰라도, 그 기억의 조각들은 책으로 책장에 남아 있다. 책을 읽지 않게 되더라도 몇 권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거라는 교수님의 그 말씀이 어쩌면 이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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