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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 Jul 25. 2021

노트



오늘 밤 내 방이 없어 갈 곳 없는 노트 위에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이 노트 위에

파란 스테들러 펜 촉을 쉴 새 없이 굴리고

한 페이지 다 쓰면 잠시 멈춰 쉬고

그리고 한동안 안 마시던 와인이 생각나며 생각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맨다

어인 연유인가

오늘 내 가장 오랜 친구가 결혼했다

가장 오랜 친구가 그렇게 헤벌죽 웃는 모습을 하는 건 20년간 처음 보았다

친구가 순수하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내가 있다

누군가와 평범하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산책을 하며 여행도 하고

이야기를 하고 공감하고 또 공감받는 삶을 바라는 내가 있다

갈 곳 없는 노트 위에 이런 나는 잠시 내려 두고

삼세(三世)의 나를 떠올리며

이런 글자들을 써 내려간다

- 나는 화개를 가진 이로, 드러내지 않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 오직 단 한 명 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바라는 것이 단지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를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목적으로 여기고는 있는 건가 고민하며

머릿속은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논쟁으로 가득 찬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냥 번잡하지만은 않아

누군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해 준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하늘은 한 사람에게 큰 일을 내릴 때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시험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참을성이 생기며 이로운 점이 많아져 못 할 일이 없게 된다

뜻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같이 길을 걷고

혹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금강석과 냇물과 소나무와 태양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괴테와 맹자와 예수가 그러하듯이





영감 받은 작품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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