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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 Aug 13. 2023

죽음에 대하여

누구나 죽음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살면서 약 10년 주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 군 복무 때 이후 한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가 10년이 지난 요즘, 가의 책을 읽다가 목숨을 바쳐서 깨달을 수 있다면 오히려 싼 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내가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 초등학생 때 처음 인식한 죽음 : 공포


살면서 처음 죽음이 무섭다고 느꼈던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죽음이란 깨어나지 않는 잠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만약 내가 오늘 밤 잠이 들어서 내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엄마도 못 보고, 친구들도 못 보고, 식사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은 당시 나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분명 태어나서 그 나이까지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3650 여번 정상적으로 자고 다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일 일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그 생각이 나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날 피곤했나 본지 나는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고, 전날 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푹 자서 다음날 스스로 머쓱했던 기억이 있다.


2. 군대에서 생각한 죽음 :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다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20대 초반 군 복무 중이었을 때의 일이다. 부잣집 아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온실 안 화초에서 자라온 나에게 군대는 그야말로 정글 그 자체였다. 살면서 혼나보거나 욕 이라고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GOP 상황병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때까지 먹어온 욕의 95% 이상을 한 달 내에 먹어버렸으니 그때 멘탈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맨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고 진지하게 시뮬레이션까지 돌려봤다.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이유는, 내가 처해있던 그 현실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죽음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자살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단순히 개인의 약한 마음 때문일 것으로 치부하면서 그럴 생각을 할 바에 마음을 다잡고 새로이 살아가면 될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극한 상황에 내몰리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의 상황도 모르면서 너무 함부로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으로, 그때 죽지 않고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글 쓸 수 있었던 건 당시 주임원사님이 나에게 '힘들어 보이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겉치레가 아닌 진심 어린 말을 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 한마디를 듣고, 사람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뼛속 깊은 곳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베푸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이 분은 훗날 합참 주임원사가 되셨다. 그분의 인품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인걸지도 모른다)



3. 사회인으로 생각한 죽음 :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요즘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다행히 과거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증도가, 무문관, 벽암록 등의 책을 읽으면서 죽음의 모습과 마음의 자유를 연관 지어 생각한 결과, 결국 죽음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삶의 끝과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죽음은 삶과 함께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동시에 똑같은 정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과 사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에서 목숨을 바쳐 깨달음을 구하고 다른 사람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은, 이제 더 이상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죽음은 결국 삶과 함께 하나의 동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죽음)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와도 같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를 위해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한 이차돈이나, 평화를 위해 분신공양을 한 베트남 승려의 모습은 어쭙잖은 자기희생도 아니고,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것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죽음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을 살펴보면 오히려 순수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 모습일 것이며, 분명 그 본인들도 나와 같이 생각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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