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온은 '면역력'일까, '무균실' 덕분일까

by 새벽의숲

종합심리검사 결과지를 받아 든 상담 선생님의 표정은 미묘했다. 인쇄된 종이 속 그래프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듯했다. TCI와 MMPI 결과, 내향성과 우울 수치는 그래프의 천장을 뚫을 기세였고 기질의 특정 영역은 0과 100이라는 극단적인 수치를 오갔다.


선생님은 수치만 놓고 본다면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아픈 사람의 데이터라며 의아해했다. 데이터는 분명 '환자'를 가리키는데, 그 앞에 앉은 나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직장을 다니고 밥을 먹으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질적으로 취약하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져야 할 성격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진단. 그럼에도 나는 겉보기에 멀쩡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나는 우울했다. 그때의 감각은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만큼 힘들지 않다. 나는 그저 누구나 이 정도의 우울은 안고 사는 것이라 여겼다. 다들 스트레스받으며 사니까, 이게 평균적인 삶의 무게일 거라 짐작했다.


나의 이런 생각을 전하자 선생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의 수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며, 모두가 그런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은 내가 견디고 있는 무게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결과를 듣고 멍하니 지난 시간을 복기했다. 검사 결과는 참담한데 내 삶은 평온하다. 이 간극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문득, 내가 '괜찮아진' 게 아니라 그저 나의 '환경'이 좋아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 마음의 면역력이 강해져서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곳이 바이러스나 세균이 없는 '무균실'이라서 아프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보다 나아진 경제적 상황, 나를 괴롭히지 않는 관계들. 그런 환경 덕분에 나의 취약한 기질이 발현되지 않고 숨죽여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환경이 조금이라도 균열을 일으킨다면, 나는 다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선생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강해진 게 아니라 운 좋게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다고.


나의 자조 섞인 분석에 선생님은 그것 또한 높은 수준의 자기 통찰이라고 답해주었다. 좋은 환경에 있어도 불만만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환경이 좋아졌을 때 안정을 찾은 것 자체가 내가 환경과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해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나아진 것이 맞다는 위로. 그것은 내가 환경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나에게 맞게 조율해 왔다는 인정이었다. 상담실을 나서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되새겨보았다. 세상에 조금 더 관심 갖기, 타인을 관찰하기,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기. 타고난 기질이 극단적이라 할지라도, 후천적인 노력으로 채워야 할 빈칸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무균실 밖으로 나가도 무너지지 않을, 진짜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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