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을 떠올려보면 솔직히 그리 멋진 시작은 아니었다. 나는 추리닝 바지에 헐렁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긴장감이 없어서도, 잘 보이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한껏 꾸며낸 모습 대신 날것의 나를 먼저 보여주고 싶은,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포장 없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계획도 틀어졌다. 야심 차게 고른 식당은 대기가 길어 급하게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자칫 민망해질 수 있는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음식은 맛있었고, 무엇보다 상대의 태도가 빛났다. 당황한 기색 없이 유연하고 다정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빳빳했던 내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식사를 마친 후 자리를 옮겨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챙겨 온 '대화 카드'를 꺼냈다. 첫 만남치고는 꽤 유별나 보일 수 있는 물건이라 속으로 조금 걱정했지만, 그 엉뚱함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카드를 매개로 오가던 대화와 그 웃음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다음 약속이 생기고, 함께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연인 특유의 설렘이나 분위기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감정이란 게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자라나는 건 아니니까.
이 관계를 뭔가로 불러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즈음, 우리는 서로 같은 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편했고, 대화는 늘 즐거웠다. 그런데 그 '좋음'이 우리가 기대했던 종류의 감정으로는 끝내 자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억지로 끌고 가기엔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다그침도, 서운함도 없었다. 다만 좋은 사람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팠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추리닝을 입고 나갔던 첫 만남도, 계획이 틀어져 헤매던 저녁도, 대화 카드를 꺼내 들며 어색하게 웃던 순간도. 그 서툴고 엉성한 시간들이 지금도 가끔 선명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