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아이가 버겁다고 말하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높은 곳을 보지 말라고,
낮은 곳을 보라며.
더 힘든 아이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실제로 나는
그 말대로
스스로를 붙들어온 시간도 많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 덕분에
조금 나은 쪽에 서 있는
행운아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태생이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내 상황이 더 나빠질 가능성을
먼저 헤아리는 편이다.
그건
남과 나를 비교해
마음을 눌러보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
상황을 미리 헤아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은
위로이면서도
어딘가 서운했다.
그 말 앞에서는
내가 겪는 이 힘듦이
비교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 같았고,
더 말하면
괜히 투정처럼 들릴 것 같았다.
또 그 말을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 보면
이런 뜻처럼 들리기도 했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 어려움은
네가 당연히 감당하고
극복해야 하지 않겠느냐.
딸에게 건네는 위로로는
꽤 난폭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조금씩 입을 닫아버렸다.
엄마의 위로는
서툴렀지만
사랑에서 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랑을
다른 말로 건넬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특수교육전공자로서
또 다른 장면을 마주하곤 한다.
사람들은
내가 특수교사였다는 걸 알게 되면
종종 지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인의 자녀가
발달이 남다른데,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무엇을 해주면 좋아지는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질문들에는 대개
아주 살뜰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정작 그 아이의 부모에게는
혹시 상처가 될까 봐
차마 묻지 못하고,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몰라
말을 고르다
한참을 멈칫했을 마음.
그래서 그 질문은
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발달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조금씩 달라진다는,
그래서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조심스럽고도 불분명한 대답 앞에서
그들은 종종
급히 이야기를 정리하거나
잠시 멍해지곤 했다.
흔히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아이가 타고난 것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아이마다 다르다는 뜻일 뿐이다.
그래서 발달은
쉽게 하나의 답으로 묶일 수 없다.
발달이 더딘 아이와
그 가족의 시간은
단순히 아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사람인지,
삶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경제적 여건과 관계의 밀도,
지지받는 환경까지.
너무 많은 조건들이
겹쳐져 함께 작동한다.
게다가 어릴수록
아이의 발달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장애인지, 발달지연인지,
일시적인 지체인지, 장기적인 특성인지.
그 경계는 늘 흐릿하고,
시간 속에서만 조금씩 드러난다.
부모가 장애를 가진 아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여행에 비유한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 갈 줄 알고 비행기에 올랐는데,
도착해 보니 네덜란드였다는 이야기.
그 비유를 빌리자면,
아이의 발달의 남다름을 발견하고
이윽고 확인해 가는 시간은
아직 착륙하지 못한
비행기 안에 있는 시간에 가깝다.
이탈리아를 바라지만
이탈리아는 아니라는 것만
분명할 뿐,
프랑스인지 오스트리아인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
몸과 마음을
한껏 조인 채
도착지를 기다리는
그 황망한 시간.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풀이 과정에 있거나,
하나로 정해질 수 없는
여러 갈래에 가깝다.
나의 전공, 특수교육 역시
이 질문들 앞에서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한다.
감히 말하자면,
김붕년 교수님이나
오은영 박사님이라 해도
그 끝을
명확히 예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의 난폭한 위로도,
그들의 난감한 질문도
결국은
사랑에서 나온 말이었다.
다만
사랑은 언제나
듣는 법을
함께 데려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법보다
정답과 해결법, 조언과 충고를 버무린
이야기를 내어주는 법을
더 많이 배워온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는
명확한 고통 앞에서는
연민으로 예의를 차리지만,
일상이 가능해 보이는 어려움 앞에서는
쉽게 극복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큰 불행은 불쌍해지고,
작은 불행은
견뎌야 할 문제로 밀려난다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일은
이 사회에서
잘 맞지 않는 일이다.
사람은
듣는 이가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전할 때
조금 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 앞에서
듣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무언가를 보태는 대신
하나씩 덜어내는 일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말 대신
지금이 얼마나 버거운지를
그대로 두는 것.
“유치원에 보낼 때마다 힘들겠네.”
다른 사례를 꺼내기보다
이야기가
내게 와닿은
마음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
“마음이 무겁겠구나.”
앞날을 대신 예언해주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이야기를 정리해 주겠다는 욕심을
잠시 내려놓는 것.
“그런 점이 정말 걱정되겠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공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내게는
‘듣고자 하는 태도’에
더 가까웠다.
말을 덜 하는 것,
고개를 끄덕이는 것,
한 박자 늦게
상대의 말을 돌려주는 것.
그렇게
가만히 귀 기울여주는 동안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조금 더 꺼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이 이야기를 들으며
힘이 되어주고 싶고,
위로해 주고 싶었던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경우,
그저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다만
그 들어줌에는
조금의 마음씀이 필요하다.
말을 앞서지 않으려는 마음씀,
정리하지 않으려는 마음씀,
이야기가 더 이어져도
괜찮다고
몸으로 말해주는 태도.
그 정도면
이미,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