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동안 설레는 날들이 이어졌다. 흥미로운 분야에 발을 살짝 담근 기분이 좋아서 평범한 일상에 소소한 활력이 돌고 있었다. 난 학기를 등록하기 전에는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던 사실도 잊고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공강이나 휴강으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이 생길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 갔다. 평소에도 난 전공 서가 보다 인문학 서가에서 자리를 잡는 편이었는데, 연기에 관심이 생긴 그 무렵에는 연극영화 전공 서가로 주 서식지를 옮겼다. 그러나 연기 전공 아이들의 커리큘럼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서가의 분류체계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책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텍스트만으로 연기를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수많은 책 가운데 어딘가 낯이 익어서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몇 장 훑어보기도 하고 아크로바틱과 관련된 책도 몇 장 훑어보았다. <배우수업>을 읽고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은 ‘배우는 군인과 같아야 한다’는 대목이었다. 자신만의 규율에 대한 중요성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도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일상은 삶에 리듬감을 더했고 꿈에 가까워지는 계단이 되었다. 꿈은 희망과 비슷하다. 실현 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배우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안은 채로 수행하는 노동은 고통이 아니었다. 내게 학교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2.
교수님은 며칠 전 달밤 옥상에서 우리가 펼친 술주정에 가까운 즉흥연기를 나 몰래 녹화했음을 고백했다. 난 술자리에서 대뜸 연기를 해보라 시키는 교수님의 요구가 그의 술버릇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교수님은 고시원 총무 형을 시켜서 디지털카메라로 내 ‘연기’를 촬영하라고 미리 주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명 없는 옥상에서 촬영한 영상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실상 녹음파일에 가까운 것이었고 내용물 역시 제대로 쓸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교수님은 ‘연기’라고 할 수 없는 그것을 학교 예술대 학장에게 보냈다.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친구고 열정 있는 놈이니까 한 번 봐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둘은 동향에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예술대학장은 영상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서 연기를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친구인지 궁금은 하니 한 번 데려오라고 했단다. 그런 이유로 난 학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래, 대략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연기과로 전과를 하거나 하는 건 어려워. 불가능해. 학사로도 안 되고 학생 연기도 안 배웠잖아. 실기는 해봤어요?”
그는 안경을 썼고 키는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야물어 보였다. 남도의 억양이 서려있는 서글서글한 말투는 친근했지만 사실에 대해 말할 때는 단호했다. 학사 체계와 개인적 한계를 근거로, 그러니까 여지가 없이 나의 ‘낙관’을 허물고 있었다.
“우리 과 애들은 길건 짧간 고등학생 때 연기를 배운애들이라고. 뭐 경영학과 라고했나? 경영학과는 다르지. 뭐 이렇게 말하기는 뭐 하지만, 경영학이야 말로 국영수만 알면 따라 올 수 있는 전공인데 연기는 달라. 그걸 고등학생 때나, 빠르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부터 배워온 애들이랑 하나도 모르는 애가 같은 공간에서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건 걔네들한테도 미안한 거지.”
“그럼 선배, 이 친구 전과 말고 전공수업 말고 연기 교양이라도, 아주 기초적인 연기수업이라도 수강할 수 있게 어떻게 안 될까요?” 예술대학장의 단호한 태도에 난 수긍 외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옆에 있던 교수님이 대신 거들었다.
“아니 글쎄 실기도 모르면 안 된다니까.” 학장은 창가 쪽에 위치한 자신의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우리가 있는 소파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학장실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막연한 희망과 일말의 기대감으로 설렜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저 교수님, 혹시 저 지금이라도 따로 연기학원 등록해서 입시연기 배우고, 학교에서는 연기과 수업 들으면서 따라가면 안 될까요? 이번 학기 등록할 때 보니까 수강신청이 가능하긴 하던데…..”
난 그대로 허무하게 학장실을 나서기가 싫었다. 거의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궁색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학사 규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물몇 살이 뭘 알았겠는가. 몰랐으니 희망이라도 품었고 그나마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다. 규정을 이유로 일말의 가능성조차 원천봉쇄되는 현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법령, 규정, 계약서와 같이 명문화된 텍스트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안 되지. 전산에서 수강 신청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취소할 거야. 연기를 배울 거면 연기과로 다시 입학을 해. 늦은 나이에도 많이들 들어와.”
그는 단호했다.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시도로 교수님은 학장의 안부와 근황을 물었고 그는 최근 MBC에서 평일 저녁 드라마를 새로 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나중에 술 한 잔 하자는(나 말고 교수님께) 말을 끝으로 면담을 종료시켰다. 그와의 면담은 사실 면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교수님과 나는 학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물러갔다. 완벽한 패배였다. 교수님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형님이 요즘 바쁜가 봐. 원래 작품 하면 예민해져.” 교수님이 말했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희망차게 시작한 하루에 절망감이 드리웠다. 화도 났다. 현실이 야속했고 틀린 말 하나 없는 예술대학장의 말이 미웠다. 너무 완벽한 패배는 오기도 불러일으켰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들이 한 곳에서 뒤엉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