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0 일어나기도 힘든 피곤한 아침이다. 화이트 와인을 한잔 마셨는데 숙취가 온 것일까? 몸이 찌뿌둥하다. 그래도 억지로 일어나서 리셉션으로 갔다. 어제 먹은 와인을 샀다. 나중에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눠먹거나 물통에 담아가려고 했다. 하나에 13유로밖에 하지 않은 그것을 배낭에 넣었다. 데카트론에서 배낭을 하나 구입했었다. 이제부터는 배낭을 앞뒤로 메었다. 여태껏 썼던 신발과 가랑이가 터져버린 바지를 이제야 버린다. 바지들아 여행하느라 고생했다. 안녕이다.
보르도의 아침. 트램정류장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바욘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곳에서 생장으로 갈아타야 된다. 기차에 타자마자 뻗어버렸다. 도착시간 10분 전에 알람을 맞췄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옆에 프랑스 여성분이 알람을 듣고는 나를 깨워줬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역을 지나쳤을 것이다. 'Merci Beaucoup'.
바욘으로 도착해서 옆 플랫폼으로 갔다. 조그마한 전철이 보인다. 거기에 올랐는데 한국인이 몇 명이 보인다. '아이구 반갑십니더. 와 요는 한국인들 많네이' 경상도 특유의 아재 톤으로 아저씨 한분이 인사를 해서 반가웠다. 겨울의 까미노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은 꽤나 보인다.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한국인이 탔고 젊은 한국 여성분도 내가 앉은 쪽 앞쪽의 문으로 들어와서는 자리를 잡았다. 가면서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같이 순례길을 걸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미노 시작의 도시 '생장'으로 가는 기차
생장에 도착해서는 각자 아는척하지 않고 순례길 사무소로 갔다. 그렇지만 비슷한 시간에 다 같이 들어갔다. 사무소 안 프런트에 할머니께서 앉아 계신다. 앞에 한 명씩 앉아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사무소의 할머니께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때 까미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다 같이 있으니 설명을 모두들 들었지만, 앉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전부 신경 쓰면서 설명해주신다. 나중에는 '빨리 끝내지...'라는 나쁜 생각마저 들었다. 순례자 여권을 받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개껍데기가 있기에 2유로를 기부하고 하나를 집어 들고 가방에 묶었다. 순례자 느낌이 난다.
사무소일을 마무리하고 동키 서비스(여행 짐을 마지막 도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해주는 업체로 찾아갔다. 하지만 업체는 문이 안 열렸다. "여기 업체 겨울에는 안 한대요." 전철부터 같이 계셨던 젊은 여성분이 얘기를 해주신다. 하아... 일이 꼬였다. 그래서 아까 사무실에서 4시까지 우체국으로 가라고 한 이유였구나. 잠시 뒤 그녀는 다른 방법을 말해주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개인으로 짐을 보관해주는 곳이 있는데 우체국을 통해서 그쪽으로 보내면 된다고 한다. 나는 정보가 없으니 그녀의 말을 따랐다. 우체국으로 일단 갔다.
'생장'의 거리. 목가적인 느낌이 좋다.
우체국에 들어섰다. 70L짜리 가방과 옷들을 짐으로 보내려고 했다. 우체국에 비치된 박스들을 훑어봤다. 가방을 넣기엔 터무니없이 작았다. 임기응변으로 박스 두 개를 붙여서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젊은 여성분이 테이프가 있다고 하시니 그렇게 하면 되겠다.
"No, No! Don't do that!" 직원이 박스를 붙여 쓰는 건 불법이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박스 찾아오세요." 직원이 다시 말했다. -"어디 가면 박스 구할 수 있나요?" -"그건 아무 가게나 들러서 알아서 찾아보세요." 참 책임감 없는 말을 떠들어댄다. 일단 밖으로 어떻게든 박스를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지도를 찾으니 '카르푸'라는 대형매장이 눈에 보였다. 저곳에는 박스가 있을 것이다.
막상 그곳에 갔는데 70L 가방이 들어갈만한 큰 박스들이 보이질 않았다. 어떡하지 하면서 뺑뺑 둘러보는데 감자칩을 넣고 진열해 놓은 박스가 보였다. 저 박스면 가방이 들어갈 것이다. 감자칩이 4개밖에 없어서 다 빼고 몰래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앞에 구멍이 있긴 했지만 다른 종이를 찾아 메꾸면 되겠다.
우체국 근처에 공사를 하는 건물이 보인다. 들어가서 구멍을 메울만한 종이조각이 있을 것이다. 구멍을 메우기 딱 좋은 종이박스 두 개가 있었다. 살짝 젖었지만 괜찮았다. 그것을 들고 우체국으로 달렸다. 같이 오신 젊은 여성분이 놀라며 쳐다본다. "테이프 좀 빌려주세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젊은 여성분께 테이프를 부탁했다. 70L 가방에 옷을 다 빼서 부피를 줄이고 가방과 옷을 따로 박스에 넣어서 포장했다. 성공이다. 그리고 테이프를 둘둘 감아 소포를 보냈다. 들어가지 않은 옷 몇 개는 버리기로 결정했다. 순례길을 위해 데카르톤에서 산 30L짜리 가방을 들고 우체국을 나섰다.
생장의 풍경
알베르게(카미노를 하는 사람을 위해 순례길에 있는 저렴한 호스텔)로 가면서 여성분과 얘기를 했다. 통성명을 했다. 그분 성함은 '박유하'라고 하신다. 동행하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의견이 일치해서 즉흥적으로 팀이 됐다. 혼자 여행하는 걸 극도로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동행이란 모험을 해봐야겠다. 서로 페이스가 맞지 않거나 짜증이 나면 자유롭게 따로 가자고 약속을 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아까 갔던 카르푸에서 장을 봤다. 저녁이 되어서 밥을 먹었는데 오늘 보르도에서 산 와인을 뜯었다. 아까 같이 만났던 네 분과 동행하기로 한 여성분과 같이 마셨다. 60대 남자 두 분, 어머니와 10대 아들, 20대와 30대 사람. 나이는 다양했지만 얘기가 잘 통했다. 내일 동행을 하자고 약속했다. 밤늦게 32살 형님 한분이 오셨는데 이분도 내일 같이 떠나기로 했다.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