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카미노 시작!

'론세스바예스'까지

by 조재현

2020/01/21
알베르게에는 순례길을 표시한 지도가 있었다. 어제는 별생각 없이 봤던 그 지도가 출발할 때 보니 막막했다. '난 저 길을 다 갈 수 있을까?' 뭐 어쨌든 되겠지. 안되면 말고.

IMG_0420.jpg 조개껍데기 표시는 순례길의 상징이다. 저 표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오늘은 5시 반쯤이 되어 일어났다.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 중에 맨 처음으로 일어난 것 같다. 뿌듯한 마음에 알베르게 거실로 나왔는데 이미 2명 정도가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괜한 부심이었다.

알베르게에서 무료로 주는 빵을 먹었다. 빵은 거실 탁자에 항상 올려져 있다. 햄이나 치즈가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잼뿐이었다. 어제 주인분이 출발하기 전에 아침 맛있게 차릴 거라고 말하셔서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여서 실망했다. 말씀이라 안 하셨으면 실망이란 게 없었을 건데.

IMG_0404.jpg 어제 우연히 만나 같은 일행이 된 사람들.

어제 약속한 7시 반이 되어서 출발할 준비를 한 일행들이 알베르게 앞에 모였다. 한국인만 7명이다. 겨울에 순례길을 오는 사람은 한국인이 대다수다. 시작하기 전에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이제 출발이다.

IMG_0406.jpg 순례길 첫날의 풍경.

은퇴를 하신 65세 어르신이 알려주는 길을 찾아갔는데 조개표시판이 보이질 않았다. 왼쪽으로 조금 가니 조개표시판이 나타난다. 새벽 어스름이 깔린 초원에 소들과 닭들이 보인다. 이런 목가적인 분위기가 좋다. 한국이랑 다른 느낌이다. 몇 분 지나니 '프랑스길'의 최대 난코스인 '나폴레옹'길과 우회길이 보였다. 그 길은 겨울에는 눈 때문에 막혀서 아쉽지만 우회길로 갔다.

순례길 첫날의 풍경. 목가적인 느낌이 확 온다.

어느 정도가 가다가 차도와 조개가 알려주는 시골길이 갈렸다. 차도는 편했지만 차가 많이 지나가 위험했고 시골길은 막막했다.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분들은 차도로 가길 원했다. 나는 순례길 원래 루트로 가고 싶어서 그곳을 어필했다. 사람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간다. 1분 정도 얘기를 나누다가 시골길로 가기로 결정했다. 의견이 나눠지는 걸 보니 며칠 안돼서 각자 뿔뿔이 흩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있던 주택

시골길을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초원의 양과 소, 왼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펼쳐졌다. 날씨가 좋지 않아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뻤다. 어느 정도 가니 건물들이 서서히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아웃렛이다. 그곳을 지나 도랑 같은 강을 건넜다. 갑자기 앞에 있던 경찰 두 명이 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더니 여권 검사를 한다. 그들 말로는 강 건너부터 스페인이라고 한다. 나라 한 번 쉽게 지난다.

IMG_0418.jpg 여권 검사를 하셨던 경찰분들. 너무 멋있어서 사진을 같이 찍었다.

차도 걷다가 산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 서서히 많아져 힘들어진다. 내 앞에는 젤 나이 많은 어르신이 혼자서 엄청 빨리 올라가신다. 그분을 보면서 페이스를 맞췄다. 그런데 문득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봤다. 유하 씨가 스틱 하나를 두 손으로 붙잡고 떨면서 힘들게 올라오신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기다렸다 옆에서 같이 걸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가면 외롭진 않을 것이다.

IMG_0431.jpg 론세스바예스 도착하기 바로 전에 찍은 사진. 눈보라가 거칠게 왔다.

어느 정도 빠져나와 유하 씨랑 같이 차도를 걸었다. 어느 정도 걷다가 뒤를 봤는데 안개 때문에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알아서 따라오겠지라고 생각하고 걸었다. 얘기를 하면서 걸으니 금방 마을이 보였다. 그곳에 일행들이 보였다.
"엥? 왜 두 분은 거기로 오세요?"
일행들이 묻는다. 알고 보니 나와 유하 씨는 조개가 표시된 산길이 아닌 차도를 따라 걸어온 것이었다.

IMG_0434.jpg 차도에서 봤던 성모마리아상.

어쨌든 목적지인 '론세스바예론'에 왔다. 마을을 뒤졌는데 문 연 알베르게가 보이질 않았다. 이 마을을 지나칠까 고민하는데 불 켜진 곳이 하나 보인다. 갑자기 눈보라가 거세게 분다. 추워서 불 켜진 곳으로 후딱 들어갔다.
"알베르게는 4시에 엽니다. 여기 로비에서 기다리세요." 직원은 밖에서 내리고 있는 눈보라처럼 차갑게 말한다. 차가운 건물 안 로비 땅바닥에 누워서 쉈다.

IMG_0436.jpg 알베르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

시간이 되니 직원은 체크인을 해주고는 침대를 배정했다. 바로 씻었는데 뜨거운 물이 콸콸 잘 나온다. 행복했다.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어떤 인자하게 생기신 노인 한분이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말을 하신다. 서툰 영어로 말씀하신다. 내용인즉 알베르게 옆에 성당이 있는데 6시에 투어가 있고, 7시에 밥을 먹고 8시에 안전기원 미사를 한다고 한다. 이런 거면 당연히 가야지. "무쵸 그라시아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 알베르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거라고 한다.)

6시에 한 성당투어. 알찬 투어였다.

6시에 노인분께서 스페인어로 성당 이곳저곳을 가이드해주신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성당이 웅장한 게 좋았다. 성당에서 노인분이 입으로 소리를 내셨는데 소리가 장엄하여 압도적이었다. 노인께서는 투어가 끝났으니 식당으로 올라가 식사를 하고 8시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신다.

투어 때 소리를 내보았다. 장엄하면서 웅장했다.
IMG_0461.jpg 식당에서 먹은 밥

7시에는 알베르게 옆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파스타에 닭다리 구이와 와인까지 준다. 너무 행복해서 와인을 벌컥벌컥 두 잔 급하게 마셨다. 5분 만에 취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몸을 흥얼거리면서 행복하다고 계속 말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IMG_0464.jpg 미사를 하시는 신부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서 좋았다.
안전미사를 해주시는 신부님. 저녁때 마신 두잔의 와인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8시에 성당에 들어갔다. 가이드해주신 노인분이 미사복으로 갈아입으신다. 알고 보니 신부님이셨다. 미사를 진행하시는데 나긋한 그의 목소리가 성당 전체에 울려 퍼진다.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신비로운 느낌이 감돌았다. 미사가 좋았다. 하지만 신부님은 손짓으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는데 그것을 따라 몸이 흔들흔들거렸다. 계속하니 토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와인 두 잔에 완전 맛이 가버린 것 같다. 신부님이 우리의 눈을 마주치시면서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지만 우리를 위한 마음은 전달되는 것 같았다.

IMG_0466.jpg 미사가 끝나고 알베르게로 오면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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