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2 밤에 잠을 설쳤다. 65세의 어르신이 잠꼬대가 심했다. 소리를 지르고 자면서 들썩들썩하신다. 1시 반까지 잠을 못 잤다. 일어났는데 눈이 약간 퀭했다. 조금 걱정이다. 아침식사는 저녁을 해결했던 그곳에서 먹었다. 큰 바게트 하나에 잼, 버터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잔. 어제와는 다르게 부실했다. 이렇게 먹고 걸을 수 있을까? 다 먹고도 성에 안차서 더 줄 수 있나 물어봤다. 다행히 더 준다. 두 개를 먹으니 그나마 나았다.
이른 아침 떠날 때 보라색 여명의 모습과 어제 머무른 알베르게
출발이다.
오늘도 7명이서 출발했다. 내리막길로 조금 내려가니 마트가 나온다. 자두를 샀다. 지쳤을 때 먹으면 기가 막힐 것이다. 마트를 나오면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길을 따라 있는 초원과 동화 같은 집.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눈 덮인 피레네 산맥. 같이 동행한 모자 중 어머님이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에 동감했다.
오늘 출발할 때 보였던 풍경들. 피레네 산맥에 얹혀진 눈이 절경이다.
어제처럼 힘든 코스는 다행히 오늘 없었다. 어제에 이어 목가적인 분위기의 풍경들은 자주 보였다. 언덕배기에 있는 양들과 울타리,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있는 조그마한 성당들. 걷는 건 힘들지만 마음은 편해진다. 이 엄청난 광경만을 찍고 싶었지만 앞에서 65세의 어르신이 전투적으로 걸어가셔서 사진에 자꾸 나오신다.
길과 일행들
언덕들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서서히 갈리기 시작했다. 전투적인 어르신이 너무 빨리 걸으신다. 그분과 같이 오신 선생님 어르신은 그분 페이스에 맞춘다고 둘이 먼저 앞질러갔다. 나와 유하 씨가 두 번째로 어머니와 아들은 우리 뒤에서 그리고 섭이 형님은 그보다 더 한참 뒤에서 가기 시작했다.
'주비리'로 가는 길
1시 반이 되어서 오늘 코스의 종착지인 '주비리'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이 작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햇빛이 쨍쨍한 게 날씨가 한국의 4월 같았다. 마을은 아기자기하고 예쁜데 겨울의 까미노라서 마을이 텅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숙소는 3시쯤 되어야 문을 연다고 나오고 상점과 공공기관들은 문을 닫았다.
'주비리'로 가는 길
다음 목적지인 '팜플로나'까지의 거리를 구글로 확인해봤다.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나온다. 유하 씨랑 잠깐 상의를 했다. 지금 시간이 이르니 그곳으로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팜플로나'는 까미노에 있는 몇 안 되는 대도시여서 한국 라면과 김치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 살짝 무리해도 거기까지 가서 이틀을 머물기로 했다.
'주비리'마을
'주비리'를 나가는데 마을에 하나 있는 알베르게 앞에서 앉아있는 두 어르신을 마주했다. 두 분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전투적인 어르신이 여기에 머무는 게 떨떠름해 보인다. 나와 유하 씨가 '팜플로나'까지 간다고 하니 '저것들이 나를 제끼고 먼저 가?' 이런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나가는 길에 '주비리'로 들어오는 모자 일행과 마주쳤다. '팜플로나'에 가려고 했지만 컨디션 때문에 '주비리'에 묵을 거라고 하신다.
좋은 글귀다. 한국인들이 순례길을 많이 걷나보다.
1시간 정도 걸었을 때였다. "생각해보니깐 저분들하고 연락처도 교환 못했어요.ㅠㅠ" 유하 씨가 말한다. 아차 싶었다. 나는 작별할 때 '팜플로나'에서 분명 만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질 못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분들은 잘 계실까요?"라고 말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전투적인 어르신이 거의 날아오시듯이 우리 쪽으로 온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 어르신은 우리와 마주쳤다. "해지기 전에 빨리 갑시다."라는 짧은 말을 우리에게 던지고는 곁을 떠나신다. 저렇게 오버페이스를 해도 되는 걸까?
'주비리'를 막 지나 '팜플로나'로 가는 길.
가는 길에 예쁜 풍경이 많았지만 5시쯤이 되니 해가 지는 게 보인다. 걱정했지만 다행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걷고 있는데 도로에 공중 화장실이 보인다. 그 옆에 잠깐 누워 쉬면서 호스텔을 예약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뒤에 오던 모자 일행이 따라왔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님이 지금 인터넷이 안돼서 숙소 예약을 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신다. 내 폰으로 같은 곳에 예약을 했다. 또 며칠간 같이 지낼 생각을 하니 행복했다.
'팜플로나'로 가는 길에 찍은 사진
어둠이 서서히 몰려왔지만 마을의 불빛이 보여서 희망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 숲길을 걸으며 마을을 찾아가는 나그네가 된 듯 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보랏빛의 일몰. 마을을 찾아나서는 나그네가 된 느낌이다.
드디어 마을에 들어섰다. 생각만큼 도시가 크지가 않다. 구글에서 보니 '팜플로나' 옆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다 구멍가게가 보여 들어갔다. 물과 코카콜라, 그리고 초코바를 샀다.
가게에서 나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벤치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다. 가로등 불에 의지하여 재밌게 농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지친 우리의 모습과 상반되었다. 하지만 코카콜라, 초코바를 먹으며 그 아이들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힐링이 되었다. 걸으면서 땀범벅인 된 우리와 농구하면서 땀범벅이 된 그들은 땀범벅이 된 건 공통점이다. 늦은 밤이지만 '팜플로나'까지 힘내서 갈 수 있을 것 같다.
'팜플로나' 초입에 도착하니 7시 반. 유하 씨는 너무 힘들어서 입을 굳게 닫고 걸으신다. 파이팅을 내려고 눈치 없이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많이 했다. 지쳤는데 웃어주시는데 고마웠다.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9시. 극도의 쾌락이 몰려왔다. 그것을 잠시로 하고 아시안마트로 갔다. 라면과 김치를 사기 위해서다. 대형마트도 들러서 삼겹살까지 샀다. 호스텔 주방을 이용해서 저녁을 해 먹었다.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어 직접 했다. 배고파서인지 허겁지겁 말도 없이 드신다. 피곤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 12시가 되어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