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난로의 불은 밤을 지새우고

성당에서의 하룻밤

by 조재현

2020/01/29
아침으로 샐러드를 먹었다. 유하도 샐러드를 샀는데 다른 종류를 샀다. 유하는 한입 먹더니 표정을 찡그린다. 맛이 없다면서 남긴다. 내 거는 맛있는데.

까미노를 걸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순례길을 걷는데 말이 줄어들고 대신 생각이 많아진다. 내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의 왕따, 4번의 수능시험, 여러 번의 연애 실패, 낯선 곳에 적응해야 했던 호주 워홀, 26살의 군대 등등. 이런 이유 때문에 몇 년 전에는 철학적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수롭지 않은 생각들을 하면서 걷는다. 그때보다는 불안한 것들이 많이 없나 보다.

까미노의 길

오늘은 태양이 강렬했다. 경량 패딩을 입고 걷는데 땀이 많이 난다. 패딩을 벗으니 춥지도 않고 괜찮다. 스페인의 겨울은 따뜻하다. 12시가 되어 한 마을에 도착했다. 잠시 쉬면서 가져온 웨하스랑 자두, 요플레를 먹었다. 복숭아 맛 요플레는 기똥찼다. 먹을 때마다 씹히는 복숭아가 좋았다. 다음에도 먹어야겠다. 다 먹고 다시 걸었는데 다시 추워져서 패딩을 꺼내 입었다. 참 이상한 날씨다.

IMG_0807.jpg 날씨가 더울정도로 따뜻했다.

3시쯤 되어 알베르게로 도착했다. 성당에서 알베르게를 하는 곳이었다. 성당 귀퉁이에 쪽문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분위기가 스산해서 도로 내려가고 싶었다.

평원이 보이는 까미노길과 마을의 벽화

'올라?'
소리가 울리면서 계단에 울려 퍼진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할머니 한분이 내려오신다. 우리에게 알베르게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준다. 숙식은 공짜이고 내일 떠나기 전에 내고 싶은 만큼 기부를 하면 된다고 한다. 오늘 하루 지내면서 결정하겠다. 짐을 풀고 씻으니 뒤늦게 오던 모자 일행이 왔다. 그리고 지나가다 마주친 한국인 여성분 한 명과 한국인 부부 이렇게 차례로 왔다.

IMG_0833.jpg 오늘의 알베르게는 따뜻했다. 여러모로.

알베르게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안에는 불이 피워져 있다. 분위기가 좋다. 옆에 클래식 기타도 있었다. 심심해서 쳐보았다. 오랜만에 하니깐 재밌어서 한 시간 정도 친 것 같았다.

벽난로 앞에서 기타를 쳤다.

7시에 성당에서 하는 미사가 있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했던 좋은 기억 때문에 또 찾아갔다. 어르신 몇 분이 오시더니 미사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우리를 축복해주는 그런 말들이었다. 순례길에서 평생 받을 신의 은총을 다 받을 것 같다.

알베르게가 있던 성당.

8시에 식사를 했다.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데 주인 할머니와 아까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같이 요리 준비를 하셨다. 병아리콩으로 만든 수프가 맛이 나쁘진 않았는데 사람들은 두 번 먹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그것 다음으로 햄이랑 계란말이 같은 것이 올려진 바게트 빵을 가져오신다. 다양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푸짐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두 분이랑 같이 얘기를 하는데 영어가 잘 통하지는 않지만 스페인어와 섞어가며 바디랭귀지로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재밌었다.

IMG_0835.jpg 저녁식사시간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기서 봉사활동을 하시는 거라고 한다. 다른 봉사자들과 몇 개월 단위로 돌아가며 이 성당 알베르게를 지킨다고 하신다. 인생의 황혼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사는 것이 정말 멋있었다.

IMG_0842.jpg 벽난로는 밤새 따뜻하게 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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