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2 오늘은 아침부터 짜증이 밀려온다. 각자 떠나는 일행들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부터는 혼자 걷는다. 같이 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혼자 하는 것이 처음에는 서툴겠지. 역시나였다. 가방 깊숙이 던져 넣었던 여권을 어디 있는지 몰라서 출발 전에 찾는다고 혼이 나가버렸다. 유하가 가장 먼저 나간다. 20분 정도 지나서 나갔다. 나머지 3명은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간다고 한다.
카미노 길 지도
나갈 때 알베르게 관리하시던 분이 나를 붙잡더니 남미 사람처럼 생긴 사람보고는 나를 지목하며 뭐라고 말하신다. 아마 나를 따라가라는 제스처를 취한 듯했다. 그리고는 그사람은 말도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 걷는다. 외관을 보니 청바지에 일반 가방이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 가는 길에 찍은 사진
그런데 계속해서 나를 따라온다. 뭔가 무서우면서 신경 쓰였다. 그것에 신경이 팔려 길을 잃었다. 카미노 길을 찾다가 20분간 도시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오늘 기분도 영 좋지 않은데 이런 상황까지 겪으니 나 스스로에게 슬슬 화가 났다. 혼자 여행을 많이 해서 독립적으로도 뭐든 잘하는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닌 존재라는 걸 느낀다.
길을 겨우 찾아 왔었다.
겨우 길을 찾아 걸었다. 도시의 길을 벗어나고 시골길을 따라갔다. 2시간 정도를 걸어도 그 남미분은 내 뒤에서 따라온다. 이제는 말해야 될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얘기를 했다. 페루 사람이었다. 번역기를 사용하여 말을 전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기분이 좋지 못해서 혼자 가고 싶습니다. 먼저 가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페루인은 이 문장이 번역된 스페인어를 보더니 자신은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도와주는 게 도리이지만 오늘은 아무 말 없이 혼자 걷고 싶었다. 기분이 그렇지 못해 정말 미안했다.
흙길을 따라 걷는다.
혼자 있으니 많은 생각들이 든다. 내 주변 사람들과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들 말이다. 걸어오는 길에 여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층층이 쌓인 구름, 그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초록색깔의 땅과 풍력발전기들. 그 모습이 멋있다. 그 풍경으로 넘어오는 세찬 바람소리와 거기에 홀로 서있는 나는 적막했다.
길 위의 퓽경
풍경이 예뻐서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걷다가 멈추니 배가 갑자기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참으려 했지만 지금 장을 비워야 한다. 길 옆에 돌무더기가 보인다. 꽤나 커서 사람 한 명쯤은 거뜬히 숨을 수 있었다. 가방에다 항상 챙겨두었던 휴지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돌무더기 뒤에 숨어서 볼일을 봤다.
왼쪽에 보이는 돌무더기 뒤로 숨어들어 자연의 부름에 답했다.
사람이 지나갈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용변을 보는 내 앞은 초원이 촥 펼쳐져있고 파란 하늘에 구름까지 기가 막히다. 영어에서 대소변이 마렵다는 것을 돌려 말해 'call of nature'.이라고 한다. 즉 자연의 부름이란 뜻이다. 이런 자연에서 볼일을 보니 정말 자연이 부른 것이 확실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용변을 봄
마무리를 짓고 큰 돌로 자연의 흔적을 숨기고 길을 떠났다. 돌무더기가 우리나라 산에 흔히 보이는 소원을 비는 돌탑처럼 생겼었는데 누군가는 내 똥을 가린 그 돌들을 보며 소원을 빌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카미노 표시판
4시가 되어 오늘 머물 마을에 도착했다. 40km를 걸었다. 평지라 힘들진 않았지만 오래 걸어서인지 양발의 뒤편에 물집이 잡혔다. 유하는 미리 이곳에 와있었다. 참 빠르다.
오늘 머무를 '프로미스타'로 가기 위해선 이런 길을 지나야 한다.
마을을 대표하는 성당
일찍 와서 슈퍼를 돌아다녔는데 일요일이라서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오다가 본 음식점이 있어서 거기로 갔다.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나쁘진 않았다. 밥을 먹고 알베르게로 오니 나머지 3명이 도착해있었다. 오늘 다들 찢어질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우리를 피했던 스페인어를 잘하는 한국인도 와있다. 그분은 아까 내가 피했던 페루인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한다. 그분 말로는 페루인은 부르고스에서 휴대폰, 지갑, 여행할 때 중요한 것들을 다 도둑맞았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어제의 알베르게에 왔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날은 생각 안 하고 있는 것들을 부랴부랴 싸들고 아침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페루로 돌아가는 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예정 도착일에서 3일이 지난 후라고 한다. 참 대책 없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을 바로 하는 것은 배울 점인 것 같았다.
길에서 본 부서진 성벽
밤늦게 우리보다 늦게 온 3명이 저녁으로 어머님이 들고 오신 고추장에 밥을 비벼 드신다. 한국의 맛을 느끼고 싶어 한입 떠서 먹었다. 역시 음식은 한국음식이다. 한국 돌아가면 한국음식 미친 듯이 먹겠노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