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은희경_생각과 정서 근육의 신비, 달리기

뜻밖의 내가 또 있다

by 경쾌늘보


내가 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내가 또 있는 것이고
내 속에 어떤 사용하지 않았던 생각의 근육, 정서의 근육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이
뭔지 모르게 신비로워요.




100쇄 작가, 오래 달려온 작가를 만나다


이번 '작가의 달리기' 시리즈를 시작하며 알게 된 큰 수확이 있다.

바로 오늘의 작가, 은희경 작가다.


한국 여자 작가들 중 달리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몇 분이 있지만,

은희경 작가처럼 등단한 지 오래되었고 동시에 오랫동안 달리기를 해왔던 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더욱 반가웠다.


문학 작품의 100쇄 인쇄는 영화계의 1000만 관객 그 이상의 의미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1995년에 발간하여 2022년에 100쇄를 인쇄하는 특별함을 준 소설 <새의 선물>의 작가 은희경은 1959년생이다.


은희경 작가는 <이중주>라는 중편소설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가로 등단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장편소설 <새의 선물>이라는 작품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이후 여러 문학상을 차지하며 명성을쌓아왔다.



규칙의 탈출, 글쓰기의 시작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후 고등학교 교사를 했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그만두고 출판사 편집부등에서 일했다. 결혼과 출산 후 두 아이를 양육하며 '숙제하듯 사는 삶'에 대해 내면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으며 착하고 착실한 모범생의 삶, 그러나 질문은 없는 삶 속에서 '이것이 내 인생인가?'에 도전한다.


순응주의자로 살았기에 질문이 없었고, 숙제가 주어지면 시스템 안에서 안전하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정답을 맞히려 했던 것 같다. (중략) 30대 중반 어느 날, 이것이 내 인생인가, 하는 어떤 각성과 함께, 소설을 한 번 써보자는 용기가, 어떤 간절함이 불현듯 생겼다. 축복 같은.
(세계일보, 2022/2/10)


맥없는 삶의 맥을 끊어 버린 것은 30대 중반이었다. 거듭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들을 하다 한 달간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그 기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학교를 일찍 들어간 탓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여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은작가는, 국민학교 때 백일장에서 수상 경험이 있었고 다른 어느 것보다 글쓰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누군가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으면 "작가요."라고 말했다고.


그녀는 주어진 대로, 남들이 하라는 방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질문들을 소설로 써나갔다.



은희경 작가 주요 작품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중국식 룰렛> 등등,

장편소설로는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 줘>, <태연한 인생>, <빛의 과거> 등을 펴냈다.

산문집으로 <생각의 일요일들>과 <또 못 버린 물건들>등이 있다.



건강한 몸에서 좋은 글이 나온다


그녀는 미국에 잠시 거주하던 2000년대 초, 한 작가의 달리기 에세이를 읽고 달리기 시작했다. 최근 2023년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달리기 예찬을 했다. 60세가 넘은 시점에 20년 이상 달려온 은희경 작가는 오랜 글쓰기만큼이나 달리기의 삶도 지속해 왔다. 중견 작가이자 중견 러너, 참으로 반가운 지점이다.


김연수 작가처럼, 은희경 작가의 작업실 역시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 있기에 주로 호수공원을 달렸다. 그녀는 주로 오전에 글을 쓰고 점심에 달리는 루틴을 하곤 했고,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지인들과 술 한잔 한다고 한다.


참 재밌는 게 사람들은 누가 뛰면 자기도 뛰고 싶은가 봐요. 따라 뛰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또 가끔은 이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막 빨리 뛰어와서는 절 따라잡거든요. 근데 조금 가면 제가 다시 그 사람을 앞질러요. 저는 그냥 똑같은 속도로 뛰었을 뿐인데요.


은작가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꾸준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설 쓰기도 같아요. 저는 그냥 똑같은 속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해온 건데, 어느 시대에는 이게 가볍다고, 어느 시대에는 무겁다고 말하죠. 그런 거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esquire, 2022/9/24)


작가는 규칙적으로 일하는 직업이다. 생각나는 그때그때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정한 시간 규칙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몸을 사용해야 하고, 꾸준히 쓰기 위한 체력을 위해서도 달리기는 작가에게 좋은 운동이라고 은희경 작가는 "몸의 컨디션이 좋아야 좋은 글이 나온다."라고 강조한다.



자아탐험과 창의성의 도구, 달리기


맥을 끊고 판을 뒤집는 것은 그녀의 글쓰기 작업에서도 일어난다.

'글이 안 써질 때 나를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힘'이라는 질문에 은작가는 답했다.


판을 뒤집어야죠.
일단 안되는데 막 붙잡고 있지는 않아요. 그저 내가 지금 피로도가 높구나, 하고 받아들여요.
그럴 때는 환경을 바꿔주는 게 좋아요. 앉아 있었다면 밖으로 나가버리고, 장소를 바꾸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달리기가 최고예요. 정신이 복잡하면 육체를 혹사시키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앉고 싶어지거든요.
(씨네21 인터뷰, 2023/9/29, )


어쨌든 이 달리기가 사실 소설가한테 조금 맞는 운동인 것 같아요. (중략) 달리기는 그냥 저만 조절하면 저를 가지고, 아까 소설이 실험적 자아를 통해서 인생을 탐험한다고 했는데, 제가 저를 탐험하면 되거든요.
그리고 지구력이 있어야 되고 뭔가 달리기를 하면서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소설 특히 잘 안 써질 때 지겨울 때, 어떻게 할까, 술을 한잔 마시고 잘까 아니면 산책을 할까 아니면 나가서 좀 뛸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항상 뛰는 게 제일 효과적이에요. 뛸 때 생각은 조금 더 뭐랄까요 템포가 있어요. 좀 평범한 생각보다 조금 몸이 힘들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요.

(문학동네 유투브, 은희경의 ‘책에게 말 걸기’)


그녀의 달리기에 관한 언급 중 속도를 달리하면 달라지는 생각의 각도에 공감이 간다. 걸을 때의 속도에서 하는 생각과, 속도를 올려 달릴 때의 생각은 확실히 다르다.


필자의 경우 속도에 비례해 그저 힘들다는 생각이 들거나 달리기 자체만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을 탐험하는 시간이라는 것엔 조금도 반대할 여지가 없다. 달리기에 더 경지가 올라간다면 창의성과 직접 연결이 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소년을 위로해줘


은작가의 달리기 예찬과 달리기 경험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가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에서 10대 소년 주인공 연우를 통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나 지금 ‘나’라고 하는 전 존재, ‘나’라고 하는 전 우주를 오롯이 혼자 짊어진 채 달리고 있는 거야. 내가 팽개치는 순간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내가 떠메고 나아가는 한 그것은 전진한다. 나는 나다. 어쩐지 스스로 강해지는 기분.
<소년을 위로해줘 中>


은희경 작가의 말대로 달리다 힘들면 '나는 이 정도야, 뻔한 인간이야' 생각 들지만, 뜻밖에 내가 또 있고 내 속에 사용하지 않았던 '생각의 근육, 정서의 근육'이 있다는 것이 신비하다고 했다.


필자의 경우엔 끊어진 듯 하지만 희미하게 이어가는 '인내의 근육'들을 살짝 맛보게 되는 것이 다음 날 다시 운동화 끈을 묶는 동력이 된다.



메달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하프마라톤에서 3등을 했던 적이 있다. 10km 정도는 꾸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달리기를 좋아했지만, 당일 날씨가 너무 나빴다. 참가 포기자가 많았고, 덕분에 어쩌다 3등으로 메달을 얻게 됐다.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그런 행운도 '꾸준함'과 '날씨가 어쨌든 나는 간다' 하는 꺾이지 않는 마음에게 돌아오는 선물이지 않을까.

작가의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에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아깝다는 핑계로 버리지 못했던 그녀 집안의 물건들에 대해 위트 있는 시선으로 쓴 글들이 담겨있다. 그녀의 22개 물건 들 중, 자연스레 '메달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가 관심을 끈다.


작가의 남편분으로 알려진 K의 어쩌다 풀코스 마라톤 참가 에피소드 끝에 3km를 앞두고 (포기자) 수거 버스에 올라탄 K와의 대화에서 은희경 작가의 마음의 근육은 다시 드러난다.


당신 안에는 힘이 남아 있었어. 근데 버스에 타는 걸 기정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힘이 꺾여서 사라져 버린 거야. 우리 안의 어떤 힘은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려..
<또 못 버린 물건들 中>



은희경 작가에게 달리기는


좋을 글을 쓰는 건강한 몸을 만들어주고, 창의적 생각을 자극하는 운동이다.

작가에게 필요한 몸의 근육뿐 아니라 생각과 정서의 근육을 단련해 주는 꾸준한 훈련이자

글쓰기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필자의 여담


"제가 달리기를 좋아하는데 하루키 흉내 내는 거 아니에요. 김연수 씨 흉내 내는 거 아니에요."

어느 북토크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에 멈추게 되었다.

언젠가 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던 걸까.

"네! 흉내 내는 것 아닙니다. 은희경 작가님만의 달리기 응원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대문사진 은희경 작가 이미지 출처 Esquire





다음 편에는 외국 남자 작가분을 모실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