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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무빙 Jan 25. 2023

설날의 예쁨

예쁘게 입고, 예쁜 거 먹고, 예쁘게 살아

18명이다.


결혼해서 한 집에 아이들을 두 명씩 낳았으니 4인가족 4세트 더하기 아빠, 엄마까지 총 18명.

엄마 연세가 올해 75세다. 짱짱한 몸놀림에 고우신 얼굴 그 모습만 보면 일흔다섯 나이가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작년 추석 셋째 언니의 제안으로 딸 넷 집을 돌아가면서 명절에 모이기로 했다.


띵동. 샤인머스켓과 천혜향 그리고 묵무침 거리를 들고 벨을 눌렀다. 거실과 부엌 이방 저 방에서 식구들이 나온다. 반가운 얼굴들. 사랑하는 내 사람들. 막내네가 마지막 도착이다.


안주인인 큰언니의 움직임이 바쁘다.

우리 큰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까칠이다. 영화 인사이드 플로우를 보면 주인공 안에 사는 다양한 성격들이 등장한다. 그중 까칠이가 가장 메인인 사람이 바로 큰언니다.


“나 피곤해. 나 뭐 시키지 마.” 명절에 엄마네 집에서 만나면 나오는 언니의 단골멘트다. 누구는 시댁 안 다녀왔나. 다들 음식 하는 거 거들고, 설거지 전문 용역처럼 열심히 움직이다 왔구먼 꼭 저런다. 게다가 엄마는 명절 준비한다고 혼자 만두 빚고, 전 부치고 아무튼 진짜 피곤하실 텐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엄마는 아웃 오브 안중인 거다.

“힘든가 보다. 들어가 쉬어라.” 엄마의 큰 딸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막 쉬란다.

2,3,4호의 반발과 험담에 귀 간지러울 법도 한데 잘도 잔다. 그것도 능력이야.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피곤한 스타일이다.

기분 좋을 때는 “엄마, 이거 너무 맛있다. 맛있어.”하고, 일하기 귀찮아해서 그렇지 뭐 하나 하면 속도가 엄청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한다. 덧붙이자면 똑똑해서 설거지 속도도 빠른 거란다. 설거지하다 말고 멍청하단 말도 들었으니 어이없다. 멍청이. 그릇 분류 않고 열심히만 문질러만 댄다고. 시간, 효율 따지는 똑똑이 언니님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내가 답답해 보이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설거지하다 멍청이가 뭐니. 애증의 관계 우리 큰언니. 밉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가끔 스크레치는 나더라도 예전만큼은 아니다. 딱 그만큼 언니의 모남이 안아진다.







큰언니는 예쁜 거 정말 좋아한다. 언니가 난을 가꾸고, 화원에 가서 꽃 사는 것을 즐기는 게 낯설었다. 예쁜 옷을 사고 입는 것을 즐긴다. 동생들한테 예쁜 것 주는 걸 좋아한다. 예쁜 그릇을 선물하고 예쁜 옷을 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

 “예쁘게 입고 다녀.”


2호, 3호 언니들이 이사를 했을 때 큰언니는 집들이 선물로 올리브 나무 데려왔다. 그걸 보고 있던 내게 너도 하나 사주겠다고 했다. 화원에 가서 올리브 나무를 직접 고르고 토분도 골라 심어왔다. 나무도 토분도 참 곱다. 그러면서 얘기했다.

“예쁘게 살아.”



똑똑이 그녀의 집에서 설 명절을 보낸다. 부엌에서 사부작사부작 바쁜 언니의 모습이 보인다.

거실에 6인용 탁자 두 개가 나란히 붙여져 있고, 아들 졸업식 때 선물한 난꽃이 꽃병에 담겨있다. 그리고 촛대와 초, 와인잔이 놓여있다. 테이블 매트가 촥촥 깔리고 그 위에 조카 둘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두고 있었다. “오- 분위기 좋은데?”


먹어도 먹어도 끝도 없이 먹히는 엄마표 만두가 눈에 띈다. 셋째 언니가 아침 일찍 노량진 수산시장에 다녀왔다더니 광어와 연어가 나 여기 있다며 뽀얀 얼굴을 들이민다. 남양주 별내동에 있는 맛집이라며 둘째 언니가 가져온 매콤한 만두전골 등장이요.

그리고 마지막 큰언니표 소갈비찜 대령이시다.

엄마의 만두 &  둘째언니가 사온 전골
입애서 살살 녹는 회, 큰언니표 갈비찜


소갈비찜. 자태가 우아하다. 따로 살짝 데쳐 넣어주었다는 청경채들이 나란히 줄 서 있다. 밤과 함께 같은 크기로 돌려 깎기를 당해 새로워진 무와 당근이 초록 청경채 옆에 놓였다. 튼실해 보이는 대추, 무엇보다 핵심인 갈비의 결을 따라 윤기가 촤르르 흐르고 있었다. 예쁘다.


늘 피곤하다며 어슬렁어슬렁 자리에 앉는 큰언니의 움직임이 오늘만큼은 날렵하고 섬세하고 친절하다. 역시 엄마 만두라며, 회 떠오느라 수고했다며, 만두전골 국물이 매콤하고 좋다며 듣기 좋은 말들을 보낸다.

나도 거들었다.

“언니, 갈비 너무 맛있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담았어. 눈으로도 먹네.

“그렇지? 예쁘게 해 놓고 먹어. 예쁜 거 먹어.”


오늘도 그녀는 얘기한다.

예쁜 거 먹어.







뼈 때리는 잔소리가 특기인 우리 큰 언니 마음에는 예쁨이 있다. 까칠이 너머에 예쁨이 가득하여 동생들이 예쁘게 꾸미고, 예쁘게 입고, 예쁜 거 먹고 살길 바란다.


저녁도 냠냠


예쁨.

바쁘게 매일을 살다 보면 대충 먹고, 대충 입기 마련인데 언니 덕분에 잠시 쉼표 찍으며 나에게 예쁨을 더 해본다. 얘기하다 보면 자주 화가 나서 밉기도 미운데 돌아서서 알게 된다. 저저 저기 저 안에 진심을.


그렇게 설날에 예쁨을 보고, 예쁨을 먹으며 예쁨 받았다.

언니집의 올리브 나무 잎들이 유난히 빛나보이는 날. 오늘은 그런 날.


언니도 예뻐라. 더 많이 예뻐해 줘라. 나도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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