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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무빙 Jan 05. 2023

친절한 둘째씨

떠나지 말아요


신정동 그 골목길에 접어들면 하나, 둘, 셋 똑같이 생긴 집이 나란히 세 채. 저기 우리 집이 보인다.

삐그덕 대는 철문의 끼익 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가면 유리로 된 현관문이 있다. 여름철 태풍이라도 오면 그 현관문이 깨질까 봐 걱정했더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거실과 안방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부엌과 작은 방이 있다.

작은방. 동경의 방이고, 놀이의 공간이다.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둘째 언니의 방이다. 


작은 방은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사용하였는데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큰 언니는 늘 공부하느라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집에 왔다. 그러니까 나에겐 2번 언니의 방이나 다름없었다.







사과 - 과자 - 자동차 - 차비 - 비옷 - 옷장 - 장롱 - 롱? 롱? 에이. 다시 시작해.

그날도 끝말잇기를 했다.  종종 작은 방에서 잠을 잤다.

“불 끄고 와!”

“무서워. 언니가 꺼..”

“불 끄고 오면 끝말잇기 하지.” 아싸! 끝말잇기. 등에 진짜 불이라도 붙은 듯 벌떡 일어나 전기 스위치를 껐다. 금세 찾아온 캄캄한 어둠 속을 세차게 뚫고 언니 옆에 딱 누웠다. 이불을 덮고 포근한 언니의 어깨, 팔을 비비며 그렇게 끝말잇기를 했다. 힌트도 주는 착한 언니.

언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렇게 몇 번이고 이어서 했다. 귀찮았을 법도 한데 둘째 언니는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밤은 깊어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점점 말이 느려지고 말끝이 흐려졌다.


딸만 넷 낳은 엄마는 늘 머리카락을 짧게도 잘랐다. 우선 어깨에 커다란 보자기를 두른다. 천 자를 때나 쓰는 커다랗고 묵직한 그러면서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열심히 자르시긴 하는데 이게 심상치 않다. 자르다가 좌우가 안 맞다고 한번, 뒤가 삐져나왔다고 두 번, 이쪽이 짧아졌다며 세 번… 그렇게 머리카락이 점점 더 짧아졌다. 길고 길어 단발머리라도 되었을 때는 어떻게든 예쁘게 묶고 싶었다. 머리를 묶을 정도의 길이가 되었어도 엄마는 여섯 식구 집 안 살림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눈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머리를 하나로만 묶어주셨으니까.

어느 날 언니가 앉아 보란다. 그 작은방이다. 언니의 따스한 손이 내 머리를 만진다. 굵직한 빗으로 엉킨 내 머리카락을 슥슥 펴내고 빗었다. 뒷 머리는 남기고 왼쪽부터 오른쪽 귀 방향으로 꼼꼼하게 무슨 작업을 했다. 뭐 하는 거지. 가만히 좀 있어보란다. 아. 궁금해.

디스코 머리 완성. 거울을 보고 행복했다. 공주 같았다. 자아도취. 이렇듯 날 행복하게 하는 좋은 언니다.


두 번 정도 먹어봤을까. 언니가 고등학생 일 때 햄버거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간 돼지고기에 당근, 양파 등 야채와 양념 이것저것을 넣었다. 그리고 조물조물하여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워냈다. 예쁜 꽃이 피어나는 기분. 언니 옆에 꼭 붙어 지켜보았다. 침 꿀꺽 삼키면서. 제과점에서 사 온 깨가 박힌 버거용 빵을 조심히 반으로 갈라 그 속에 갓 구워낸 패티를 껴넣었다. 야무지게 잡고 입을 크게 벌렸다. 처음 먹어보는 햄버거다. 그렇게 기쁘게 배 불리는 언니다.







아담한 키에 새하얀 피부, 초등학교 다닐 때는 6년 내내 반장을 해서 소풍 때면 선생님 도시락까지 싸갔던 우리 언니다. 주근깨도 있고 공부보다는 노는 걸 좋아했고 딱히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없었던 내게 둘째 언니는 사랑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예뻤다.

언니 나이 5살 내가 1살이었을 때 포대기로 나를 업어 키웠다고 한다. 정말 믿기 힘들지만 진짜로 그랬단다. 그래서일까.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자꾸 붙고 싶고 계속 놀고 싶었다.


언니가 좋아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고, 농구대잔치를 보며 언니가 좋아한 기아를 응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느라 바쁠 때에도 친절한 언니는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면 차분히 알려주었다.







둘째 언니는 1995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다. 나의 어여쁜 언니. 내 사랑이 잠시 떠났다. 여전히 하얗고 예뻤지만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말수도 줄었다.

20살 언니는 재수를 하기로 결정하였고, 매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갔고 밤늦게 들어왔다. 언니의 방문도 닫혀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언니의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무서운 사춘기.

따뜻한 나의 둘째 언니가 차갑고 냉랭하다.


끝말잇기 하고 싶은데...


사진출처  pixaba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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