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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무빙 Dec 28. 2022

반찬 전쟁

그녀의 반찬 시퀀스


낯 뜨겁다.

아 짜증 나. 또야?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 소녀들의 점심식사는 상당히 전투적이었다. 3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도시락 가방을 들고 늘 만나는 그 자리로 모여든다. 점심시간에는 놀아야 한다. 2교시만 돼도 배가 고프지만 오후의 배고픔을 생각해서 조금 예의를 차려본다. 3교시를 마쳤으니 이제는 먹어야 한다. 10명의 여고생이 책상을 돌고 의자를 넘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녀들의 손은 미친 듯이 빨라진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펴고, 먹고, 정리까지.


도시락 반찬 뚜껑이 하나씩 열리며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교실을 은근히 채웠다. 젓가락부터 들고 광속으로 팔을 뻗칠 준비를 하고 열리는 반찬 뚜껑들을 응시한다. 10쌍의 젓가락이 맞붙여놓은 두 개의 좁은 책상 아니 밥 상 위 반찬 통에서 춤을 춘다.


소영이가 싸 오는 핑크빛 소시지는 늘 내 마음을 훔치고 설레게 했다. 첫 번째 소시지는 입에 구겨 넣고, 두 번째 소시지는 음미했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소시지를 욕심내어 두 개는 먹었다.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양의 핑크빛 소시지. 잘 풀어진 노란 계란물에 퐁당 담가 잘 달궈진 기름을 두른 펜에 노릇노릇 익혔겠지. 이미 식은 소시지부침이지만 젓가락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탱글탱글 함,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을 채우는 포근함,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움까지 모든 게 완벽한 사랑스러운 반찬이었다.


열자마자 순식간에 비워지는 통들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소시지 그리고 햄, 동그랑땡, 고기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인기 없는 반찬은 언제나 김치류, 나물 그리고 멸치볶음이다.


뚜껑을 열었을 때 내 반찬통에 잠시 머물렀던 친구들의 눈빛은 0.00001초 만에 사라지고 젓가락도 통 오질 않는다. 그랬다.  문제의 반찬들. 바로 나의 김치볶음과 멸치볶음이다.








"엄마 또 해?"

"응. 거의 다 먹어서..."

반찬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는 멸치를 볶고, 김치를 볶았다. 우리 집 상전 고3 셋째 언니의 요청이다. 자기는 멸치볶음이랑 김치볶음이 제일 맛있다나? 도시락 반찬으로 그것만 싸달라고 했단다. 말도 안 돼.

엄마는 셋째 언니에게 고마웠을는지 모르지만 막내딸은 미쳐버릴 노릇이다.


“엄마! 제발 그거 그만 싸. 다른 반찬. 소시지 해주라고.”

엄마한테 그 소시지 반찬을 해달라고 했지만 고장 난 라디오처럼 딴 소리를 하고 때로는 먹통 전화기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은근히 기대하며 반찬통을 열어보아도 여전히 멸치볶음과 김치볶음. 휴.


셋째 언니에게는 그녀만의 사연이 있었다. 언니가 고1. 나와 같은 나이이던 그때에 고 3인 둘째 언니가 도시락 반찬으로 햄이랑 돈가스를 싸달라고 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게 햄과 돈가스에 질려버린 셋째 언니의 선택은 김치볶음과 멸치볶음이었던 것이다.





또 어이없는 건 둘째 언니의 도시락 사연이다. 어느 날 점심시간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반찬통 두 칸 모두 빨갛고 빨간 김치로 한가득했단다. 그때 친구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고, 너무 민망했다고.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는 햄이랑 돈가스를 싸달라고 했다는…에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도시락 가득한 김치 - 햄과 돈가스 - 김치볶음, 멸치볶음 - 소시지요청(이루어지지 않음.)

우리 집 도시락 주 반찬의 변천사는 대략 이렇게 된 것이다. 엄마의 계획 없는그녀의 반찬 시퀀스.


질리도록 먹었다. 엄마의 멸치볶음은 날이 갈수록 진화했다. 처음엔 먹기도 부담스러운 몽뚱이 큰 멸치에서 잔잔한 멸치로 바뀌었다.

‘언니 졸업하기만 해 봐라. 맨날 소시지 싸달라고 할 거야.’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급식이 시작되었기에.






도시락. 큰 언니부터 막내까지 도시락 챙기던 시절에는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생각해서 인당 두 개씩 그러니까 5-6개씩 매일 싸야 했다. 내가 한다면 생각도 못할 일, 기억 속 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일. 아직 깜깜한 새벽에 부엌불은 늘 켜있었다. 새끼들 먹이려고 매일 새벽 일어나 빈 도시락 통에 새로 지은 하얀 밥을 담으시고 빈 반찬통을 하나하나 채우셨던 엄마. 얼마나 힘드셨을까. 고민되었을까. 파업을 외치고 싶지는 않았을까.


내 자식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점심은 급식으로 먹고 온다. 그게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다. 그래서 가끔 소풍이라도 가게 되어 도시락을 싸야 할 때면 부담이 된다. 엄마에게는 1주일에 한번 오는 주말 도시락 휴업이 반가웠을 일이다.

반찬 뚜껑을 열 때 고개 내민 멸치와 김치볶음이 창피하고 싫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추억이 되어온다.


기름 두른 펜에 고소하게 볶아낸 달콤 짭짤한 멸치볶음.

김치를 팍 숨이 죽게 볶아내고, 참기름 토도독 떨어뜨리고, 깨 팍팍 뿌려준 김치볶음.


이 두 가지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지겨운 맛이 어느새 그리운 맛이 되었다.

엄마의 맛.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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