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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무빙 Dec 19. 2022

주근깨 여자 사람

혹시 당신도.


주.근.깨


이름도 주근깨가 뭔가.

영국 해리 왕자와 결혼한 배우 메건 마클은 주근깨가 많은 편이다. 그녀는 주근깨 없는 얼굴은 별이 없는 하늘과 같다고 표현했다. 별이라...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존감 높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 집 네 딸은 사이좋게 둘둘씩 아빠와 엄마 피부를 닮았다. 둘째와 셋째는 엄마의 하얗고 투명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닮았다. 첫째와 넷째는 살짝 까무잡잡하고 건조한 아빠의 피부를 내리받았다. 큰 딸과 막내인 나는 뽀얀 피부가 늘 부러웠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렇다. 내 얼굴에는 문제의 주근깨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따뜻한 봄날엔 들꽃 뜯어 돌멩이로 빻아가며 소꿉놀이를 했다.

뜨거운 여름날에는 초록 풀피리를 불어가며 얼굴 뻘겋게 달아오르도록 뛰어놀았다.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부는 가을날에는 알록달록 나뭇잎 모아 기지를 만들고 놀이를 했다.

쌩쌩 추운 겨울에는 자전거를 타며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눈 놀이도 지겹게 했다.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하늘땅 별땅, 한발 뛰기, 숨바꼭질, 술래잡기 등 동네 친구들과 1년 365일 중 360일은 밖에서 노는 아이였다. 그 여파로 주근깨가 생긴 게 분명하다. 다른 이유는 암만 생각해도 없다.


언제부터 주근깨가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주근깨가 있는 얼굴이 너무 싫었고,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도 변치 않는 진리처럼 내 안에 굳어져갔다.








12살 어느 날 엄마랑 같이 시장을 가다가 길에 서있는 자동차 창문에 비친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엄마! 혼자가! 나 집에 갈래.” 그렇게 뒤돌아 집에 오는 길에 울었다.

뽀얀 피부에 곱게 화장을 하고 핑크빛 립스틱까지 바른 엄마가 너무 예뻤다. 창에 비친 엄마가 너무 예쁘고 난 못생겨서 집에 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돼.



외모 콤플렉스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세상 제일 무섭다는 중2. 문방구에 노트를 사러 갔다. 문구점 아줌마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어머! 주근깨가 많네. 너무 귀엽다.”

‘아씨. 뭐? 귀여워?’ 똥 씹은 표정을 보긴 본 건지

“왜? 싫어? 주근깨 있는 거 너무 귀여워. 유명한 외국 여배우들 중에도 주근깨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아 그만하라고. 무슨 상관이야? 남 얼굴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데?’

어금니가 꽉 깨물어졌다.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들고 있는 노트를 그 자리에 툭 던지고 나와버렸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 한마디 못한 채.



고2 어느 날 교실에서 같은 반 아이가 장난치면서 내 볼을 쓱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어? 만지기까지가 어렵지. 만지니까 피부.. 좋네?”

‘아우, 열받아. 싸우자는 거냐?’ 만지기까지가 어렵다는 게 무슨 뜻이냐. 그냥 대꾸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웬만해선 자기표현을 잘했던 나인데 주근깨 때문에 작아졌다.

주인공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보다 친구 다이애나가 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알까.







20살이 넘어 화장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을 때 컨실러도 써보고 팩트도 두드렸다. 이건 뭐 주근깨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니 컨실러라는 게 의미 없다. 내 나이 27살에 신촌역 앞에 있는 피부과에서 IPL이란 걸 하게 되었다. 50만 원을 큰맘 먹고 결제하고 레이저 시술했다. 찌르는 통증에 얼굴이 뻘겋게 초토화되었던 그날 진짜 짜릿했다. 시술 후  며칠 후부터 얼굴에 올라앉은 조그마한 딱지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갈 때 나는 켜켜이 쌓여있던 묶은 허물을 벗고 있었다. 점점 뽀얗게 되었지. 마음에 숨어있던 혼자 쌓아둔 앙금도 녹아들었다.

예뻐졌다느니 얼굴이 환해 보인다느니 칭찬을 듣다 보니 자신감도 넘쳤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세월이 한 참 지난 오늘도 놀이터에 있다. 뻥 뚫린 놀이터를 환하게 비춰주는 햇볕에 다시 주근깨와 기미가 올라온다.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나선 놀이터에서 같이 뛰고, 가끔 앉아 온전히 그 하늘을 마주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하늘을 그때와 같이 온몸으로 마주한다. 마음도 모르고 제 멋대로 찾아온 기미 주근깨를 거울로 보고 있자니 여러 감정이 스친다.  


밉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슬프괴롭지 않다.  내 마음도 자랐나 보다. 외모에 집중하던 때.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에 메여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주근깨를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이제 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중한지.


주근깨 소녀를 사랑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이제라도 말해줘야지.


사랑해.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던 주근깨 소녀.


그리고 또 하나! 27살 그때 말이야. IPL 참 잘했어.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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