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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무빙 Dec 11. 2022

꼴 보기 싫은 모직코트


“아! 안 추워.”



짜증 나는 목소리로 현관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주먹이 꽉 쥐어진다. 정수리는 차갑다 못해 뜨겁고, 내쉬는 콧바람에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도 금세 말려버리는 칼바람이 불었다.


관광버스 기사이신 아빠, 평범한 가정주부인 엄마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다. 아빠는 남들이 깨어나기 전에 집을 나서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운전기사의 수입은 변변치 않았던 터라 네 딸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빚은 늘었다.


네 딸 중 막내. 흥도 많고, 목소리도 크고, 잘 놀았고, 공부도 꽤나 했다. 물욕이 있었던 걸까? 어린 시절 물욕이라 하면 자전거랑 바비 마루 인형을 갖고 싶은 정도.


중학교 입학할 때 엄마는 금장 단추가 달린 커다란, 정말 커다란 검정 모직 코트를 사주셨다. 앞으로 딸내미가 더 클 것이라 여기며 조금 오버하자면 두 명이 동시에 입어도 될 듯한 큰 코트를 사주셨다.

나름 비싼 옷이다. 촉감에서 알 수 있다. 처음 입었을 때 느꼈던 포근함과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기억난다. 반짝이는 금색 단추도 예쁘고 새 옷이 좋았다.


그런 옷이 집에 네 벌 있었다.

그러니까 첫째 딸 중학교 입학할 때 한 벌, 둘째 딸 14살에 두 벌, 셋째 딸 초등학교 졸업해서 세 벌 그리고 막내딸 사춘기에 네 벌.


장롱을 열어보면 오래되도 멀쩡한 금장 단추 모직코트 네 벌이 쪼르륵. 버리지도 못하는 이제 더 이상 입지 않는 코트가 척척척 걸려 있는 꼴이 보기도 싫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새 옷이 생긴 기쁨에 어깨뽕이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입었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에게 1년이면 족하다. 엄마는 말했다. 언니들은 안 그러는데 유난 떤다며, 날도 추운데  따뜻한 옷 두고 도대체 왜 그러냐며 나무랐지만 듣기 싫다. 

각 잡힌 어깨 뽕은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키도 더 크지도 않았고 체구도 비슷한데 여전히 헐렁하다 못해 치렁치렁한 코트가 너무 싫어 옷장 속에 처박아 둘 수밖에.








친구 A양은 아빠가 돈을 잘 벌어오시는 모양이다. A양은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을 엄청 좋아했는데 서태지가 입고 나와 인기 끌었던 브랜드인 스톰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양현석이 입었던 힙합 브랜드 펠레펠레 옷을 입고 싶었는데. 친구 따라 버스 타고 구로동 애경백화점에 가서 구경만 실컷 하고 와서 목청 높여 울었다.



서태지 storm. 양현석 pellepelle. 이주노 boylondon



B양은 엄마가 수선집을 하셨다. 엄마가 만드신 옷을 그만 입고 싶다고 했지만 미친 듯이 부러웠다. B가 입었던 허리라인까지 내려오는 털이 복슬복슬했던 아이보리색 재킷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꺼는 그런 재킷 세벌은 만들고도 남을 만큼 크고 새카만 모직코트뿐인데.


옷도 그렇지만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 신고 싶었다. 또 앞코가 맨질맨질 반짝이고 동그란 mook 구두도 신고 싶었다. 아디다스 츄리닝도 입고 싶었다. 친구 A, B는 그 모든 것을 입고, 신었으니까 더 하고 싶은 거다. 운동장 모래알에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날 리 없거늘 하굣길에 날마다 맑고 명쾌한 구두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 슥슥 모래알에 쓸리는 낡은 운동화가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상대적 박탈감이 이런 것일까? 늘 못 가진 것에 대한 응어리가 있었다.

신발이고 가방이고 가질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그 해 겨울 그 코트는 도저히 입을 수 없었던 거다.


기억한다. 그해 내 볼과 손등이 빨갛고 허옇게 들뜨고, 텄다. 손등이 아려온다. 조금 더 심해지면 곧 피가 날 것 같은데 손등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코트를 입지 않았던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 안 입어!”  그렇게 몹쓸 자존심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미쳤다고 했을까? 



2022년 12월 구스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바깥공기가 기분 좋게 차갑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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