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한 읽기 쓰기
어느 소설가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서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에세이는 유명한 사람이 쓴 것이라야 사람들에게 읽힌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쓰는 에세이는 읽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소설가가 되어 좀 유명해진 다음 쓰고 싶은 에세이를 쓰려고 했단다. 팟캐스트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은 얘기라 어느 작가였는지 이름이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꽤 유명한 소설가도 되었고 에세이집도 펴낸 것 같다. 맞는 말이다. 특정 정보를 주는 개발서나 경제, 심리학과 같은 전문분야의 글이 아닌 소소한 일상 에세이는 유명인이라야 독자를 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이 내가 쓴 글을 처음으로 어딘가에 드러내어 공유할 용기를 주었다. 당연히 유명한 사람이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쓴 글을 누가 관심을 가져 읽어 주겠는가- 하는데 묘한 안도감이 생겨 블로그에 첫 포스팅을 했었다. 뭔가를 끄적여 보긴 했는데 막상 공유하려니 그럴만한 글인가, 남이 어떻게 볼 것인가 불안해진다. SNS에 공유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누가 본다고 생각하면 자의식만 심하게 부풀어 오른다. 더군다나 대가들이 쓴 읽은 책들의 글과 비교까지 되니 이 하찮은 글을 어디다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이 작가의(암만해도 이 작가가 누구인지 추적하여 찾아야 할 것 같다) 아주 평범하지만 잊고 지내던 한마디가 귀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쓴 글은 아무도 안 읽거나 아주 적은 소수가 읽을 것이다. 그러니 첨부터 목숨 걸고 불후의 명작을 써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시껄렁한 글을 한 백만 번쯤은 써놓고 보자 하는 대범한 생각이 들었다.
이는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 내는 일을 꺼리거나 자신감이 별로 없는 사람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초연 해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듯 타인들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미친척하고 대낮에 옷을 다 벗고 돌아다녀야 잠깐 눈길을 끌까. 그것조차도 금방 잊어버린다. 이 뻔한 진리를 알아차리고 보니 오히려 나를 향해 있던 눈을 돌려 세상을 둘러보는 여유가 생겼다.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다. 홀가분하고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내 속의 것을 하나둘씩 풀어내어 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왜 읽는가-
왜 쓰는가를 얘기하기 위해 먼저 나는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는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진정한 패션 passion 은 ‘읽기’ 임으로
나는 세상에서 책 읽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책 읽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미 나와 있는 흥미로운 책들도 가득한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더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니 읽고 싶은 책들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손 만 뻗어 아무 책이나 펼치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빠지는데 매일이 경이롭지 아니한가. 우울할 새가 어디 있나. 심심할 새도 오늘 뭐 하지 하는 생각을 할 일 도 없다. 어떤 드라마보다도 소설책이 훨씬 재미있다.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어느 날 시험도 없고 공부 안 해도 되는데 배우는 게 왜 이렇게 즐거울까 생각하다 공자의 이 말씀이 떠올랐다. 바로 논어의 학이편 1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이 아니던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깨닫고 익힐 때의 희열을 학교 다닐 때는 모르다가 이제야 알게 됐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뿐 아니라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먹고사는 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평생 들여 탐구해온 석학들의 생각을 배우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정신적 성장은 일상을 보다 긍정적이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독서는 종교 같은 면이 다분히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길잡이다. 나다움을 찾고 어느 날 머리를 탁 치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는 길의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지치고 힘들 때 기대고 위로받을 수도 있다. 죽어서 영생의 구원까지는 보장해 주지 못하지만 살아서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구제는 가능하다. 경험해 보니 좋아서 전도도 한다. 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함께 읽고 나누고 공유하고 싶어 진다.
왜 쓰는가-
책을 읽고 난 뒤 주체가 안 되는 감동을 어딘가 얘기하거나 써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불행히도 주변에 책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읽기는 쉽지만 쓰기는......
쓰고 싶다고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배운다고 될 일도 아니다.
이 년 전 무조건 매일 무언가를 쓰기로 했다. 다이어리를 "Daily"로 장만했다. 하루 한 페이지 씩 있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길이도 내용도 퀄리티도 아니고 “매일”이다. 꼬박 이 년 을 매일 쓰고 나서 얻은 것이 많다.
“쓸 게 없다”라는 생각을 안 한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일단 펜을 잡고 첫 줄을 시작하면 줄줄이 나온다는 것을 체험했다. 물론 쓸데없는 것이 더 많다. 주저리주저리 횡설 수설이 더 많지만 뭐든 나온다. (한참 뒤에 다시 보면 이게 내가 쓴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괜찮은 구절도 있다) 한 페이지를 채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머릿속 정리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들 하나씩 적다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인다. 누가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문제들이 명확하게 보인다. 내 속에 이미 다 답이 있다는 말이 맞다. 지금 당장 상황이 바뀌거나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니다. Step by Step 정리를 하다 보면 하기 싫었던 일도 목표를 향한 과정일 뿐이다 생각하게 되고 그리 힘들지 않게 할 수 있다.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면 과감히 그만두거나 맨 뒤로 미루면 된다.
가장 큰 이유이자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감정 조절과 테라피 효과가 때문이다- 화가 났거나 슬프거나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떨어졌거나 기쁘거나 감사하거나 그 어떤 감정이든 죽 적어 내려가다 보면 안 좋은 감정들은 어느새 스르륵 사라지고 좋은 감정은 배가 된다. 널뛰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찾는데 최고의 방법이다. 일부러 감정을 회피하거나 억지로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쓰다 보면 내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고 꾸밈없는 민낯의 나를 알아가고 나다움을 찾는 일이다.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사춘기 학창 시절부터 평생을 고민하고 헤매던 일의 저 편에 희미하게 불빛이 보여 마침내 그 어떤 일도 (설사 죽음이라도) 두렵지 않은 순간을 잠시라도 맛보게 된다.
혼자 쓰는 일기에서 보여주는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읽기는 쓰기의 욕심을 불러일으키고 일기 쓰기는 공유하는 글쓰기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좋아하는 것을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누군가와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나 보다. 내가 좋아서,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글이 저 멀리서 손 뻗어 잡아주길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가 닿아 맞잡아주는 손이 될 수 있게 진심을 다해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