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팟캐스트 1
책은 냄새입니다.
모든 책은 태생적으로 나무의 냄새를 지니고 있지요.
갓 구운 빵이나 금방 볶은 커피가 그렇듯이
막 인쇄된 책은 특유의 신선한 냄새로 당신을 유혹합니다.
좀 오래된 책이라면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나지요.
포도알 같은 글자들이 발효되면서 내는 시간의 맛입니다.
책은 소리입니다.
책과 책사이를 자박이며 걷는 조용한 발소리,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연필이 종이의 살을 스치는 소리,
그 소리는 사과 깎는 소리를 닮았는데요,
당신은 사과 한 알을 천천히 베어 먹듯이
과즙과 육질을 음미하며 한 권의 책을 맛있게 먹습니다.
눈으로 읽고, 냄새를 맡고, 소리들 듣고, 손으로 만지고, 맛을 보는 행위,
책을 읽는다는 일은 그렇지요.
생활에 무뎌진 이런 감각들이 살아나는 시간.
퇴근길에 들러서 편하게 머물다가는 동네 책방 같은 공간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곳이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동진의 빨간책방 입니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첫 회 오프닝이다. 애초에 전문을 다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다시 듣고 적으니 너무 좋아서 좀 길어도 다 넣었다.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며 빨간책방은 매 회 이렇게 허은실 시인이 쓴 감성을 일깨우는 오프닝 글과 함께 시작한다. 아마도 브런치 작가님들이나 독자들은 대부분 책을 좋아하고 ‘빨책러’일 가능성이 크므로 이 오프닝만 보아도 시그널 음악과 이동진 작가의 약간 드라이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듯할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추억에 잠길지도 모른다.
내가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처음 들은 건 2014년 5월이다. 그리고 2019년 6월 즈음에 마지막 방송을 했으니 5년을 꼬박 함께 했다. (첫 방송 시작은 2012년) 그동안 나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아이들이 이제 다 컸다는 것, 주름이 더 늘었다는 것 외에 하는 일도, 직장도 똑같고 변한 것이 없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인생의 중요한 한 시기에 만나 나의 내면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방송이라 지금의 나를 얘기하자면 팟캐스트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시작이 빨간 책방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빨간책방 오마주이다.
처음 빨간책방을 알게 된 스토리도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운명적인 데가 다분히 있다. 책을 소개하는 방송도 아니고, 감성적인 밤의 음악 방송도 아닌 대낮 두시에 하는 시끌벅적한 라디오 방송 ‘두 시 탈출 컬투쇼’에 어느 날 이동진 작가가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다. 그 당시에 한국 방송 드라마나 쇼, 라디오 방송 등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생기고 인기 좋은 ‘컬투쇼’를 CD에 담아 친구들끼리 돌려 듣는 게 유행했었다. 나 역시 컬투의 유머를 좋아해서 즐겨 듣는 광팬이었다. 작가님이 출연한 방송은 주말 방송이라 라이브는 아니고 녹음방송이었다. 영화 평론가인데 책 이야기를 하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이폰을 쓴 지 얼마 안 되었고 솔직히 팟캐스트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책 이야기라고? 무심코 듣다가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다. 내가 찾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 무엇을 누군가 알아서 바로 내 코 앞까지 가져다준 듯했다. 당장 ‘빨간책방’을 찾아 첫 회부터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책 이야기’를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이 하는 걸 듣기만 해도 이렇게 재미있을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때부터 이민, 직장, 결혼, 육아로 방치하고 있었던 나의 책 덕후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나의 독서는 출퇴근 시간에 차에서 듣는 오디오 북으로 겨우 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욕심을 내는 게 책 소장인데 종이 책을 사도 읽을 시간이 없거니와 Kindle의 등장으로 ebook으로 다 바뀌고 있는 추세라 더 이상 종이책 사는 것은 뭔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 같고 죄책감이 드는 일이어서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동진 작가는 책을 몇만 권을 소장하고 있고 아직도 엄청난 양의 책을 사고 읽는 책 덕후가 아니신가. 종이책은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시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본인의 신념대로 책을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많이 사고 모으는 분이 있다니 반갑고도 신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대에 편승해 바로 갈아타려고 한 게 부끄럽기까지 했다.
첫 방송의 주제가 2000년도에 가장 재미있는 소설 두 편이었다. 바로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천명관 작가의 <고래>! 과연!! 가장 재미있는 소설로 꼽힐 만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 모든 고민 걱정을 다 잊을 정도로 책에 푹 빠져 읽었다. 2회 3회 들을 때마다 읽고 싶은 책이 점점 쌓여갔다. 이때만 해도 온라인 서점을 활용 못할 때라 동네 한국 책방에서 비싸게 구입을 했지만 곧 온라인으로 직송 구매하고 세상에서 젤 행복한 날이 책 택배 박스가 도착하는 날이다. 한 일주일은 흥분한 조증 상태로 무슨 책을 먼저 읽을지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며 고민하다 더 오랜 시간, 더 많이 읽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겨우 진정하고 한 권을 잡는다. 이때부터 (전에도 그리 많이 본건 아니지만) TV를 완전히 끊었다. 모든 자투리 시간에는 책을 읽기 위해 늘 가방에 책 한 권을 들고 다닌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얘기하면 그 유명한 ‘속죄’ 편을 들을 때다. 1부를 듣는데 2부 (68회)에 반전 스포를 다 얘기할 거라고 하여 잠시 멈추고 (나는 원래는 영화도 스포일러 상관없이 스토리 다 듣고 보는 것도 괜찮은 사람인데 뭐에 씐 듯이) 부랴부랴 도서관에서 책과 오디오 북을 빌려 열심히 듣고 읽은 후 2부를 들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주에 ‘속죄’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서점들이 이게 뭔 일인가 했단다. 놀랍고도 기쁜 순간이었다.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건 큰 위안이었다. 덕질을 위해 관심도 없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하던 SNS 도 시작했다. 어떻게든 뭐라도 한마디 감사의 마음, ‘여기 즐겁게 듣고 있는 사람 있으니 오래오래 해주세요’ 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트윗을 열었다. 디지털 할매인 내가 물어 물어 어찌어찌 올린 방송 감상 후기가 어느 날 읽혀서 회사에서 일하며 듣다 좋아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를 뻔했다. 빨간 책방 카페에서 하는 공개방송 순례가 꿈이었는데 결국 한국 방문을 하지 못한 채 방송이 끝났고 카페도 문을 닫은 걸로 안다.
나는 여전히 생업을 위해 직장을 다니고 집에서는 아내고 엄마지만 지난 8년 동안의 책을 읽고 함께한 시간들은 그저 읽으며 재밌고 신나기만 한 게 아니라 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나를 위한 나다움을 찾고 비우고 채우고 한 시간들이다.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잘 안다. 그 당시의 팟캐스트와 인터넷은 어떤 책들을 읽을지 안내하는 길잡이고, 내 눈앞의 세상 말고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 구세주다. 공허한 지 모르고 있다가 채워질 때야 그 깊이를 실감했다. 지금은 듣기만 하던 원웨이 관계에서 온라인 북클럽도 하고 인스타도 하며 서로 소통이 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글쓰기 코치도 받아 쓰는 용기도 낼 수 있었다. 무엇을 하건 늘 책과 함께할 것이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이와 장소를 불문하고 특별하다. 팟 캐스트의 장점이 앱에서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제 어디서든 생각나면 들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아주 가끔 한 번씩 들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