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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riter Aug 01. 2023

4. 선생님의 마음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인턴을 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 차린 학원에서 과외 알바 그리고 대기업에서의 1달짜리 단기 인턴을 하기는 했으나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과외 알바는 시급으로 돈을 받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때 알던 선생님의 학원이었고 학생들만 대하면 되는 일이어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단기 인턴은 대기업에서 한 거긴 했지만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기업 사원으로 일을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는 체험 프로그램인 듯했다. 


제대로 일을 시작한 저작권 에이전시 인턴직은 책임감을 배우고, 사무직의 기본기를 배우는,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대표님과 대리님, 그리고 파트타임 인턴분, 이렇게 넷이 전부인 작은 회사에서 계약서 작성, 출판사와 전화/이메일, 카탈로그 만들기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일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표님 때문이다. 대표님은 에이전시의 직원이 모두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이룬 삶을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신 듯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나는 일이 있다. 계약서 작성을 하다 이전에 그 출판사와 했던 다른 계약 관련 서류를 못 찾겠어서 대리님께 여쭤봐야 했는데 하필 그날은 대리님이 월차를 쓰신 날이었다. 그래서 대표님께 여쭤봤다, 대리님한테 전화를 드려볼지. 대표님께서는 메모해 뒀다 내일 출근하시면 물어보라고 알려주셨다. 그냥 카톡을 드려 볼 수도 있었는데, 내일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심박하게 다가왔다. 스마트폰이 아직 신문물이던 시절이었지만 퇴근시간 이후에도 계속되는 회사의 연락에 스트레스받는 직장인들의 노고를 뉴스에서 접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대표님 책상 앞에 배치된 인턴사원의 자리에서 6개월을 지내며 일을 한다는 것의 바람직한 자세와 태도를 배워갔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 올 수록 나는 대학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제 공부를 더 해야 해서 풀타임으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에이전시를 그만두고 학교에서 여러 조교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조교를 해봤는데 각 자리마다 또 많은 걸 배웠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교수님들을 자주 뵐 수 있는 학과 사무실에서도 일을 해보고, 대형 강의 수업 조교로 들어보지 못한 교양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인문학 연구소의 학술지에서도 학술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기도 했고, 외국인 학생들이 지내는 기숙사에서 조교를 하면서 여러 나라 학생들과 더불어 살기도 했다. 


일은 재미있었으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충격으로 멍들어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초과근무를 시키고 그에 대한 대가는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은 먼지 차별이라고도 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 microaggression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인격모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고 계속 신경을 쓰자니 나만 쪼잔해지는 것 같은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감당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 인문대, 인문학 연구소에서 조차 나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비품에 불과한 존재라는 눈치도 많이 받았다. 이제는 대학 행정 시스템이 낙후되어 생겨난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시스템 내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나는 사람에 치이는 게 어떤 건지 맛보게 되었다. 


지금 보면 너무 웃기긴 하지만 그때의 일기를 보면 이런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똥개멍청이짜증나미친*죽*버려바보"

띄어쓰기도 없고 딱히 누구한테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펜을 죽어라 힘껏 쥐고 써 내려간 기억은 난다. 뭐가 그렇게 분하고 서글펐는지, 30대 중반이 된 나는 20대 중반의 나를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렇게 4년을 보내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슬슬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나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왜 자꾸 호구처럼 사람들한테 잘해주다가 이런 꼴을 당하나, 하면서 차갑게 마음의 문을 닫으려고도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안되는 걸 계속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나로 살면서 다른 이들로부터 나를 지켜가면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인간관계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내가 잘해주고 싶은 만큼 사람들에게 잘해주자. 그리고 내가 잘해주는 걸 당연히 여기거나 나를 이용하려고 하면 그만 잘해주면 된다. 깔끔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기분 상할 것도 없고 친구를 잃었다고 아쉬울 것도 없이.


하지만 개중에 되려 마음이 상해서 더 앙칼지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일을 그르쳐 놓고 윗분들께는 그저 조교인 내 탓을 하는 연구원이 있는가 하면 조직 내에 왕따가 있어야 나머지의 단합이 잘 된다며 나를 따돌렸던 동료도 있었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생길 때 내가 미쳐버리지 않고 견딜 수 있게 정신 수련을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스님들의 에세이를 그때 그렇게 많이 읽었고, 아, 내가 화가 나는구나,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구나, 아무리 알아주고 보듬어 줘도 뜨겁게 흐르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그냥 그들이 멍청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기로 했다. 그 사람은 저렇게밖에 살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사회생활을 할 줄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그렇게 속으로 타이르면 화를 다스릴 수 있는 거리가 조금 생겼다.


그런 깨달음을 갖고 살던 어느 날 나는 어른의 마음 가짐으로 선생님의 삶을 사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 아시아계 미국인 문학, 비교 문학 등에 대한 글을 쓰시는 분인데 학교 행사에 초청강사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화두는 코로나 시대 반아시아인 혐오(anti-Asian hate)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에 맞설 수 있게 대학에서는 Asian American Studies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행사를 준비하면서 믿었던 인문대의 후원이 행사 한 달 전에 결재가 안나는 나름의 참사가 발생했다. 

온라인 행사여서 예산이 많이 드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교육과 지식으로 세상을 바꿔나가자는 취지의 행사를 지지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크게 실망을 하고 행사를 준비하는 원동력에 김이 훅 빠진 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초청 강연을 마치고 나는 사회자로서 그분께 질문을 드렸다. 이 행사에 참여한 우리는 어느 정도 프로그램 형성이 사회적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효과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데, 막상 이런 생각이 현실화되려면 학교 행정을 하는 사람들도 설득을 해야 할 데,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사이에서는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교육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한다.”


교육이 교실 밖에서, 선생님과 학생 사이를 넘어서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에 감탄했다. 학생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생님이 그 학생이 적대적이어서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할게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이해를 못 하는 거라고 가정해 주듯, 행정 선생님들이 우리가 하는 작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진짜 그저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니 선생님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답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말씀은 해주셨지만 그런 정신력은 체력과도 연관이 있다는 듯 취미는 격투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행정과의 싸움에서 지는 날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밖으로 나오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덛붙여주셨다. 대학이란 기관에서 프로그램을 형성하는 것이든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에는 언제나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 싸움은 정년이 보장된 교수들이 발 벋고 나서야 한다고 설명하시며, 대학원생들은 나중에 그 일을 물려받아서 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얕은 감동이 아닌 인생의 나침반 같은 게 되었다. 사람과 부딪히면 상대가 멍청해서 그런 거 던 만트라가 진화를 하게 된다. 교육자 마인드라는 것, 결국은 선생님의 마음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되뇌어봤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그런 마음으로 인간관계에 임하는 여유와 인내심을 갖는다면 화가 아닌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했다. 상대의 의견이 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되려 방어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건방지 condescending 거나 거들먹거리는 patronizing 자세로 삶을 살겠다는 건 아니다. 내가 타인보다 더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잘 들어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티칭을 해보면 금방 깨닫는 것이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것을 두고도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면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많이 배우는 날도 많다. 그래서 내가 혼자 강의를 하면 더 편할 수업을 굳이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수업을 이끌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학생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면 서로 배우는 게 많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의 생각을 받아 적어가는 것보다는, 아, 얘는 이렇게 생각하네,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하면서 생각을 주고받다 보면 깨닫는 게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이란 우리 모두 결국은 이번 생은 처음이고 나 자신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학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상투적이어진 전투와 공격, 그리고 경쟁의 마음은 접어두고 색다른 마음으로 이번 생에 임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모두가 배우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생각과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세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그런 삶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 당분간은 계속 교육자로서 선생님의 마음을 배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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