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나는 '미국 정치'라는 전공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독보적인 지성과 강의력으로 방대한 텍스트를 거침없이 훑고 지나가셨다. 당시의 나는 전공에 큰 흥미가 없었고, 성실함보다는 세상을 향한 물음표 섞인 불성실함으로 무장한 학생이었지만, 유독 '정치 철학'만큼은 예외였다. 그중에서도 존 롤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사회에서 가장 불운한 이들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라는 그의 생각. 비상한 머리에 더해, 인간의 고통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따뜻한 가슴까지 지녔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학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도무지 현실성 없어 보이는 개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었다.
롤즈는 제안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지위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베일'을 쓴 채 사회적 규칙을 만든다면, 우리는 가장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규칙에 동의할 것이라고. 내가 혹시라도 그 불우한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역설적으로 정의로운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논리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가슴은 튕겨져 나갔다. “우리가 우리의 조건을 망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미 내 상황과 권리를 다 알고 있는 인간이 갑자기 베일을 쓰고 자기 객관화를 한다는 건,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다.
대학 졸업 후에도 이 고민은 가끔씩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 천재적인 롤즈는 이토록 불가능한 가정을 세웠을까? 그런데 최근, 나는 이 '무지의 베일'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또 다른 경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망각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온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물론 뼈를 깎는 노력과 그 뒤에 서린 피땀은 눈물겹게 위대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운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세차게 흐를 때는, 한낱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 힘을 거스르지 못한다.
운이 지독하게 따르지 않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늪에 빠질 뿐이다. 그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바닥에 딱 붙어 휩쓸려 가지 않도록 버티는 것뿐이다. 그 불운의 시기가 인생의 초년일지, 중년일지, 혹은 말년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잘나간다고 해서 내일의 안위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 하나로 인생의 방향은 언제든 비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음을, 때론 허망하게 끝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성공이 터질 수도 있음을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만할 수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는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함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베일을 써서 나를 잊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지의 베일(有知-)’, 즉 인생의 흐름을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내 화양연화가 영원하지 않음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질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지금 맺힌 내 인생이라는 꽃이 더욱 찬란해 보인다. 또한 내가 누리는 이 안위와 넓은 집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변수임을 깨닫는다면, 자만이 사라지고 더욱 겸손해진다. 이러한 인생의 진리를 안다면 어찌 강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누리는 혜택은 온전히 나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단 1점 차이로 패배했기에 내가 이 위치를 누리는 것이고, 그 시기에 운이 나를 받쳐줬기에 노력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된 것이다. 이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면, 나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을 향한 냉담한 시선은 거두어질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운명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 그 ‘유지의 베일’을 쓸 때, 세상은 비로소 롤즈가 꿈꿨던 그 따뜻한 정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다. 학교에서 전공 수업을 듣고 졸업한 지가 한참이 되어서야, 드디어 롤즈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