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중간에 끼지마오

비열한 놈과 비겁한 놈

by 서하


회사에 입사한 시기는 코로나가 한창이라 공식적인 단체 활동에 제한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입사원 해외연수도 몇년 미뤄지다가 결국은 가까운 일본으로 짧게 다녀오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솔직히 가기 싫었다. 선택권이 있다면 남아서 일을 했을 텐데, 까라면 까는 게 사회생활이니 자유란 없었다.


사실 연수를 앞두고 동기들끼리 갈등이 있어서 속이 시끄러웠던 탓이 컸다. 당시 친했던 그룹에 나보다 몇 살 어린 남자 동기가 있었는데, 우리는 초반부터 젤 친한 편이었다. 서로 업무 고민이나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를 공유하는, 친구면서도 남매같은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울분에 찬 메신저가 왔다. 점심시간에 겪은 화나는 일을 하소연하는 내용이었다.


점심시간에 같은 무리의 여자 동기 B와 과장님과 셋이 밥을 먹었는데, B가 과장님 앞에서 이 친구가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을 까발리려 했다는 거다. 당황해서 몇 차례 말을 돌리고, 하지말라고 제지했지만 결국 B는 우스꽝스러운 묘사와 함께 이 친구의 비밀을 발설했고, 친구는 과장님 앞이니까 최대한 화를 누르면서도, 너무 열미워서 B에게 꿀밤을 날렸다고 한다. (둘 다 초딩 같다) 그러자 화난 B가 과장님 앞에서 바로 "X발놈이?"라며 쌍욕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 과장님은 B와는 굉장히 친하고 이 친구와는 어색한 사이라, 더 당당하게 과장님 앞에서 기세를 펼치는 B 앞에서 친구는 할 말을 잃고 참다가 나에게 열불 나는 메신저를 보낸 거였다.


우리끼리 비밀로 나눈 내용을 당사자 앞에서 타인에게 폭로한 B의 잘못이 맞기에 나는 이 친구에게 공감해주었다. 한참 화를 내던 친구도 내 위로에 어느정도 분이 사그라든듯 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후였다. B가 다른 동기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던 거였다. 이 친구가 평소에 부적절한 스킨십과 터치를 많이 해서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시간에 터진 갈등을 성적인 문제로 부풀려 한 사람의 사회생활에 치명타를 주려 한 것이었다. 평소 B가 조삼모사하게 뒷말도 많이 하고 이간질에 능하다는 걸 알고 조심하고 있던 나도 소문을 전해듣고 이 친구가 너무 걱정됐고, 그렇게 우리 무리는 균열이 생겼다.


불편한 마음으로 떠난 일본 연수. 일정이 끝나고 다같이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마침 B가 내 옆에 앉게 됐다. 나보다 한참 어리기도 하고 겉으로는 잘 지내는 사이이기에 나는 B의 마음을 풀어주면서도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입을 뗐다.

"둘이 갈등한 거 대충 들었는데 너도 충분히 기분 나쁠것 같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걔가 그런 행동을 하는 애는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아무리 화가나도 그런 공격거리를 만들어내서 소문내면 걔 회사 생활에 너무 치명타야. 그건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말이야."

나는 진심으로 말했고, B는 자기가 잘못한 것 같다며 나중에 그 친구랑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대화로 잘 풀고 저녁 자리를 마무리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로비에서 마주친 B가 나를 못본척 하며 쌩 지나갔다. 차가운 표정을 보니 쎄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였다. 알고보니 그날 밤 B는 그 친구에게 가서 사과하고 앙금을 푼 후, 타겟을 나로 바꾼거였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건가. 전날 저녁과의 급격한 온도차이를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훨씬 더 충격적인 건 내가 챙겨줬던 나의 베프 동기의 태세전환이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B의 공격 레이더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를 따돌리는 B의 행동을 제3자처럼 방관했다. B가 보란 듯이 내 앞에서 자기를 챙기면, 그는 아무일 없었던 척 응하면서 내가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못본척 하는 '잣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B랑 갈등하고 있을때는 내 옆에 붙어있다가 화해한 뒤에는 나에게 전혀 말을 안걸고 슬슬 피했다.


사실 B의 저급한 행동은 그다지 큰 충격이 아니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었으니 기대가 없었거든. 하지만 친한 동기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5G급으로 비겁해지는 모습을 봤을 때는, 정말 징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종잇장보다 얇은 용기와 큰 덩치가 무색한 비겁함에 놀랐다. 저런 것도 사내놈이라고!


덕분에 나의 일본 연수는 '헬'이었다. 충격과 배신감에 빠져 어떻게 일정을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너무나 비열하고, 하나는 너무나 비겁했다. 비겁한 놈과 비열한 놈, 그래도 둘중에 누가 낫냐고 한다면 차라리 나에게 덜 상처를 준 비열한 놈이 낫다.


마음에 상처가 된 사건이었지만 아주 좋은 교훈을 얻었다. 법정스님의 말씀대로, 내가 고통을 겪은 건 그럴 가치가 없는 인연에게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인연을 가리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정성을 쏟은 내 잘못이었다.

과거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님아, 그 중간에 끼지마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하고 짓밟은 사람은 언젠가 그 대가를 받는다는 거다. 미래에 그들이 어떤 대가를 받든 말든 더 이상 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넌 따끈한 진심으로 너를 대했던, 니 인생에 몇 안 되는 사람을 잃었다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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