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의 원천

by 서하

어이쿠, 카페 위생교육을 깜빡하고 있었는데 수료 기간이 얼마 안남았다는 연락이 왔다.

교육은 평일 하루종일 들어야하는데, 카페와 학원을 병행하는 내가 시간을 뺄수있는 날은 아이들 시험기간 뿐이라 그 기간에 교육이 열리는 부산으로 헐레벌떡 접수했다.

'~ 하러 가는 김에 다른 ~도 하고' 주의이다 보니 교육 들으러 부산 가는 김에 여행간 것 처럼 하루 놀고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도 듣고 바다 보면서 하루 쉬고, 다음날 친구도 만나고 일석 몇조를 얻고 오겠다는 마음으로 숙소를 예약했다.

위생 교육을 듣는 날, 오랜만에 강당에 단체로 앉아서 흥미롭지 않은 강의를 들으니 잠이 솔솔 왔다. 수면제가 따로 없었다. 내 강의 시간에 조는 친구가 있으면 가차없이 깨웠는데 , 무거운 눈꺼풀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앞으론 좀 더 친절하게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버티던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근처에 봐두었던 서울깍두기에 갔다. 일찍 출발한다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출발해서 허전한 내 속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설렁탕, 최고의 선택이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강의실로 돌아가는 길에 독립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한권 샀다. ‘지금, 바로, 여기!’

인생에 정답이 있다면 이 한마디가 아닐까? 지금 바로 여기서 행복하고 사랑할 것.


‘지금 바로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라‘는 뜻도 될텐데, 오전내내 불성실했던 내 수업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설렁탕의 힘을 빌려 오후 수업은 똘망하게 집중해냈다. 아, 드디어 저녁 6시, 종일 교육이 끝났고 뿌듯한 마음으로 예약해둔 숙소로 달려갔다.

숙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시원한 바다뷰에 마음이 뻥 뚫렸다. 평일이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이렇게 넓고 쾌적한 숙소를 나 혼자 온전히 누리다니, 귀한 시간이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와인도 마시면서 푹 쉰 다음날 아침, 초등학교 때부터 베프인 벗을 만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마음을 나눌수 있는 소수의 친구들만 있는데, 도저히 마음 공유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의무적이고 피상적인 인사만 나누는 지인일 뿐 친구라고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은 북적북적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던 시절이 그리울때도 있지만, 진정성이 없는 대상에 진심을 다했을때 돌아오는 허무함 보다는 외로움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정도의 인간관계에 만족한다.


나의 베프와 만나면 서로 그동안의 재밌었던 에피소드, 떠오르는 슬픈 과거, 진지한 현재의 고민 등을 거리낌 없이 나눈다. 우리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채 얘기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 웃음이 터져서 배를 잡기도 한다. 가만히 친구를 보고 있으면, 이제는 성숙한 그녀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했던 초등학생 시절 얼굴이 겹쳐 보일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고군분투했던 친구의 삶이 떠올라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찡하다.

육아를 하는 친구, 그러다보니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고민이 많다. 이날 친구 고민의 주제는 '사랑은 흐르는 것'이었다. 본인이 누군가한테 사랑을 듬뿍받아야 아이한테도, 남편한테도, 부모한테도 다시 사랑을 줄수가 있는데, 즉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데, 받는 사랑이 부족하니 줄 사랑도 부족해진다는 고민이었다. 나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몇년전에 아빠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본인도 무뚝뚝하고 살기에 급급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도 자식한테 어떤게 최선인지 잘 모르고 했다고, 표현할 줄도 모르고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몰랐지만 그렇게 받았기에 자기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아빠의 말도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랬겠지, 다 각자의 힘듦이 있으니 인간적인 한계에 갇힐수 밖에 없었겠지. 그래도 자기는 받지 못해서 아팠을지라도, 그 아픔으로 통해서 배우고 더 노력해서 그 이상을 해내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 순환고리를 누군가는 깨부숴야 상처가 대물림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랑도 똑같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나눠줄 사랑도 부족해진다는 논리라면 누구라도 그런 논리를 대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다. 하지만 꼭 내가 그런 사랑, 그런 가르침,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야만 나도 해줄 수 있는 것인가?

그럼 태초에 사랑과 돌봄은 누가 처음 시작한 것일까.

친구는 기독교고 나는 불교라서 종교는 다르지만 둘다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신의 사랑을 믿는다. 그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의 사랑, 내 존재 만으로도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그 사랑을 믿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내 사랑의 그릇이 차올라서 사랑을 줄 수 있는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사랑의 원천’이기에 내 내면에는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사랑 그 자체인 우리, 내가 보아온 친구도 항상 사랑 그 자체였다.

사실 그녀의 고민은, 치열한 육아 속에서 정신적인 여유와 육체적인 에너지가 부족하니까, 정말 말그대로 모든 에너지가 딸려서 생긴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끊어내야 할 결핍의 순환고리. 아빠가 하지 못했다고 한 그 일을, 그리고 내 친구가 힘겨워하는 그 일을 우리가 결국 해내면 좋겠다. 사랑은 받아서 전달하는 유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빚어내어 흐르게 하는 거니까. 지친 친구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따뜻했다. 그 햇살이 친구의 방전된 에너지를 채워주길, 그래서 그녀가 다시금 스스로가 사랑의 원천임을 깨닫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친구가 내뱉은 고백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사랑하고 싶어서 나온 '성장통'이라는 걸. 잘 버텨내고 있다고,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고 건넨 나의 진심이 친구의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채워줬으면 좋겠다. 경주로 돌아오는 길, 내 안에서도 맑은 사랑의 샘물 하나가 퐁퐁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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