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한 피부과에 턱 보톡스를 맞으러 갔다.
중학생 때쯤이었나, 자고 있는 나를 엄마가 깨운 적이 있다. "너 이러다 이빨 다 부서지겠다." 그때부터 줄기차게 이를 갈아왔으니, 소중한 내 치아도 꽤 마모되었을 테다.
잘 때 마우스피스를 끼기도 했지만 착용감은 영 불편했고, 그마저도 자주 구멍이 나 새로 맞추러 가는 일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결국 내가 찾은 대안은 턱 보톡스다. 앙다무는 근육에 강제로 힘을 빼서, 이를 갈 힘조차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밥 먹는 힘도 좀 줄어들겠지만, 치아를 지키는 게 더 소중하니 1~2년에 한 번씩은 이 시술을 받는다.
이갈이는 사실, 내가 얼마나 힘을 주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 같다.
나는 항상 목과 어깨에 잔뜩 힘 주고, 요리 조리 주변을 살피며 살았다. 최고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까, 삐끗해서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긴장이었을까.
혹은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만의 전쟁터에서 한껏 안테나를 세운 채, 무슨 일이 터지면 어떻게 해결할까 늘 초조해하며 살았다.
지금도 그 불안은 여전하다. 내가 지키려는 평화가 무너질까 봐, 공들인 일들이 망해버릴까 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모든 걸 꼬아버릴까 봐 종종 두렵다.
세상에는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변수가 무한히 많은데, 미약한 내가 그 모든 걸 내 뜻대로 풀려고 용을 썼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던 거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통제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 그 차이를 알고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아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걸 이제는 안다.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기독교인 친구가 알려준 기도문을 떠올린다.
"하나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히 받아들이는 마음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와,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에는 최선을 다하면 되니 불안해할 것 없고, 내 힘 밖의 영역은 흐르는 대로 믿고 맡겨버리면 그만이다.
우주의 거대한 힘을 믿으며, 그저 움켜쥐었던 마음의 힘을 빼는 연습을 할 뿐이다.
보톡스를 맞고 얼얼해진 턱을 문지르며 달려온 바다 앞 카페. 잔잔한 파도 소리와 바다 냄새를 맡으며 온몸의 긴장을 풀어본다.
턱 근육의 힘은 약물의 도움으로 뺄 수 있겠지만, 마음의 움켜쥔 힘을 빼는 건 결국 오롯이 나의 몫이다.
이제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앙다물었던 어금니를 떼어내 본다.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힘을 빼고 둥둥 떠다니는 법을,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