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법을 가르치다 들켜버린 나이

by 서하

아이들과 함께 할 때마다 느끼는건 아이들은 그 자체로 참 귀엽다는 거다.

대학생때부터 과외나 학원에서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쳐왔으니 많은 아이들을 대했는데, 특성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다들 귀여웠다. 푸릇하고 순수한 그 자체만으로 예쁜 존재들이라서 그런가. 지금 나랑 수업하는 아이들은 누구는 잘 웃고, 누구는 어둡고, 누구는 쑥스러워하고 다 성격이 제각각이다. 그런데 자꾸 칭찬하고 이끌어줬을때 마음을 열고 조금씩 표현하는 걸 보면 다들 하나같이 순수하고 착한 면이 나온다. 부끄러워서 가리고 있어도 아이는 아이라서 특유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나올때 나도 무장해제된다.

학원을 운영한지 반년 좀 넘었으니 아직 긴 시간은 아니지만, 초반부터 같이 한 친구 중에 가르치기 정말로 힘든 아이가 있었다. 영어 기본기가 많이 부족해서 알파벳부터 가르쳐야하는 수준인데 숙제도 잘 안해오고, 단어도 안외워오는데다 자존심은 강해서 조금만 혼내면 토라져버리는 아이였다. 처음 두세달은 진짜 힘들었는데 그래도 어르고 달래고, 혼내다가 칭찬하다가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진심으로 했더니 어느새 아이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점점 습득력이 올라갔다. 그리고 몇달이 더 지나니 점점 실력에 속도가 붙으면서 언제 영어를 힘들어했던건지 생각도 안날정도로 자기 학년의 수준을 따라가는 걸 보고 놀랬다. 실력이 올라간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의욕을 보여서 그게 너무 기뻤다. 나랑 함께하는 이 시간을 낭비하는게 아니라 얻어가는게 많길, 그리고 조금이라도 즐겁게, 주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보람있는 시간과 노력인가 하고 생각한다.

가르치기 힘든 친구가 있는 반면 또 너무 수월하게 가르칠 수 있는 친구도 있다. 항상 생글생글 웃고 밝은 에너지 뿜뿜 하는 아이, 숙제는 무조건 열심히 해오고 예의 바르고 착한친구다. 공부도 잘하는 친구라 진도도 빨리 나갈수 있고 가르치면 쏙쏙 흡수하니 에너지가 빨리는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충족되는 기분을 주는 귀한 아이다. 그런데 얼마전에 너무 웃기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티 안내려고 꾹 참은 일이 있었다. 가정법을 설명하면서 현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걸 예를 들어주다가 "만약에 내가 20대라면, 나는 해외로이민을 가서 살텐데" 라는 영어 문장을 예시로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눈이 똥그레지더니 " 샘 , 20대 아니에요?" 하는거다. 원래 수업시간에 물으면 적극적으로 대답하지만, 먼저 말을 하거나 장난치는 아이가 아닌데 수업을 끊고 물어서 나도 놀래고 다른 친구도 놀랬다. 내가 웃으면서 "엥, 아니지~ 샘 30대 초반도 지났는데" 하니까 당황하고 배신당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좋은 칭찬인지! 속으론 너무 기쁘지만 웃음을 꾹 참고 "어리게 봐줘서 고맙네" 하고 수업을 이어갔다. 기쁜 마음으로 이어간 수업을 마쳤는데, 그 친구가 나가면서 "샘… 저는 샘이 당연히 20대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나이 알고나니 환상이 깨져요" 하면서 휙 도망치듯 나가는 거다. 아고 귀여운 짜식ㅋㅋ어리게 봐준건 일단 너무 고마웠지만 실제 나이에 충격받고 환상이 깨졌다고 할 정도로 내 나이가 많다는 게 씁쓸하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이 나의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감정을 말하고 일상의 고민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지만, 내가 진심을 쏟을수 있는 사람들이니 나에겐 친구다. 숙제를 안해오고 지각을 해서 가끔 열을 채우고 목소리가 커지게 만들긴 하지만, 그래도 악의는 없는 아직 순수한 친구들이다.

돌아보면 너무 중요한 시기인 10대도 금방 지나가는데, 가장 흡수력 빠르고 쑥쑥 크는 그 시기에 나랑 공부를 하기로 택하고 와주는 친구들이니 고맙다. 그러니 서로 충분히 얻어가는게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가끔 목이 터질듯 힘들고 체력이 딸릴때가 있지만, 내 역량을 키우면 덜 힘들고 더 즐겁고 열정과 보람에 불타는 날이 오겠지?

어린 양들을 따뜻하게 잘 이끌어줘야지, 그러니 내가 힘을 내야지!

아, 생각해보니 가정법 예시를 굉장히 잘못든거 같다. 나이차이 크게는 안나는 젊은 샘으로 있었으면 그 친구가 계속 더 열심히 할거 아닌가? 다음 시간부터 갑자기 의욕이 떨어진건 아닌지 잘살펴봐야겠다. 그리고 혹시나 의욕이 떨어진 듯 보이면 "If I were 20, I would still choose to be your teacher." 라고 감동을 주는 전략을 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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