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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Sep 28. 2021

26.2마일, SF마라톤 첫 완주 이야기

나에게 달리기를 선물하다


힘겹게 완주했다. 레이스 신청할 때 목표가 두 개 있었는데 첫 번째는 다치지 않기, 두 번째는 완주하기였다. 부상 없이 완주했으니 목표 달성한 셈이다. 기쁘다. 

아름다운 코스, 샌프란시스코를 달리다


속도에 따라 여덟 개로 그룹을 나눠 빠른 그룹부터 3분마다 출발했는데 난 여덟 번째로 제일 늦게 6:04시쯤 출발했다. 해 뜨는 시각이 6:56시여서 헤드램프를 머리에 두르고 출발했다. Fisherman's Wharf를 지나갈 무렵 Boudin 빵집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사워도우 굽는 냄새가 훅 콧속으로 들어왔다. 크앗, 예상치 못했던 첫 번째 어택 ㅎㅎ


Fort Maison을 지날 때 즈음 twilight이 되었고 5.5마일 마크를 지날 때 동쪽 수평선에서 빨갛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금문교에 들어서서 달리기 시작했을 땐 이미 해가 동그랗게 떠올라 물결을 반짝반짝 비춰주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 시각 그 장소 그 햇빛. 역시 오늘 뛰길 잘했다 싶었던 순간 #1.

금문교에 도착하기 전, 옆에서 달리던 러너와 서로 찍어 준 사진


어제 내가 달리기 하면서 본 가장 멋진 runner는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딸을 조깅 유모차에 태우고 달리던 아빠였다. 혼자 뛰면 세 시간 안에 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그 아빠는 연신 유모차를 멈추고 잠든 딸에게 블랭킷을 덮어주려고, 물과 간식을 주려고, 블랭킷을 벗겨주려고, 아이가 괜찮은지 살피려고, 말을 건네려고 자꾸 멈춰 섰다. 처음 내 옆을 슝 하고 지나간 게 Presidio 였는데 조금 달려 나가면 저 앞에 아빠와 유모차가 멈춰 서있는 모습이 보였고, 조금 지나면 또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열 번 정도 그렇게 만났는데 20마일 지나서는 내 컨디션 난조로 끝까지 못 만났다. 아빠와 함께 대회에 참석한 예쁜 딸은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드라이브를 시켜준 걸 기억할까.


하나 혼자 웃겼던 건 금문교를 지나 Fort Baker로 들어설 때 내 옆으로 배우 손석구 님이랑 똑같이 생긴 분이 지나간 것. 대회 전날 빈둥거리면서 넷플릭스에서 D.P. 를 봤는데 앗, 임지섭 대위님이 여긴 웬일로!!! 하필 장소도 Fort Baker라니. ㅎㅎ 그 후로도 엎치락뒤치락하며 몇 번 더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너무 닮아서 진짜 놀랐다. ㅋㅋ 


First half는 아주 괜찮았다. Pace도 일정했고 기록도 좋았다. Second half는 실전이 곧 첫 경험이었다. 종아리와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신경 쓰면서 달렸는데 18마일 정도부터는 속도가 줄고 근육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이때부터 너무 힘들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천천히 가도 괜찮으니 다치지 말자, 완주 못해도 괜찮다 마음 추스르고 힘겹게 20마일 마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좀 약하다고 알고 있던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코스 후반부에 내리막이 많은데 원래는 반가워야 할 내리막이 무릎 통증 때문에 충격이 커져서 한걸음 내딛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21마일 마크도 가기 전에 결국 medical aid station에 들러 아이싱을 하고 타이레놀을 먹고 잠깐 쉬었다. 계속 뛰면 무릎 부상이 되는 건지, 이 정도 통증은 풀 마라톤에서는 참아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21마일 지나면 SAG VAN(부상 등으로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는 러너들을 픽업하는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니 거기까지 가보고 그때 포기하던지 하자 마음먹고 뒤뚱뒤뚱 걷듯이 뛰었다. 평지에서는 통증이 줄어들고 내리막에서 통증이 심한 걸 느끼고는 그래, 한번 끝까지 할 수 있는 만큼 가보자 마음먹었다. 그때 아마 여섯 시간 안에 finish line을 통과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여섯 시간 안에 들어와야 공식 finisher) 


식구들은 러너들을 실시간 모니터링해주는 tracker로 계속 나를 지켜보았는데 20마일까지의 기록을 가지고 나머지를 예측해서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주었단다. Finish line에서 나를 보려고 주차장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나 엄마는 대체 오지를 않고 예상 도착시간보다 무려 30분 이상 늦게 도착한 나를 기다리면서 남편은 별 걱정을 다 했다고. 마지막 5-6마일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6마일 뛰는데 110분이나 걸렸으니 ㅠㅠ 하지만 어쨌든 26.2마일을 달려왔고 부상 없이 끝마쳤다. 세계기록에 조금 못 미치는 5시간 35분의 기록으로.  ㅍㅎㅎ 


Tracker app이 보여준 기록





달리기 대회에 나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같이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하다. 진짜 그만두고 싶었던 24마일 마크 무렵에서 "It is SO close. You gonna run!"이라고 외치며 활짝 웃어준 언니, 말할 기운도 없어서 thums up만 날려주던 아저씨, 아무 말도 안 해도 너도 나처럼 힘겹게 뛰고 있구나 알 것 같은 사람들. 그냥 존재 자체가 고마운 타인들.


무모한 구석이 많은 걸 알고는 있지만 2년 전에 하프 한번, 그보다  전에 10 k 두세 번 뛰어 본 게 전부다. 2년 전 하프 후로 꾸준히 달리지도 않았는데 고작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훈련하고 뛸 생각을 하다니 안 다친 게 감사할 뿐이다. 집 계단을 오르고 내려갈 때마다 앞으로 며칠 매우 고통스러울 것 같다. 그래도 기분은 참 좋다.



첫 풀 마라톤을 앞둔 왕초보 마라토너의 우왕좌왕 훈련 기록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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