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비겁하게 느껴질 때
한동안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하는 일과 해보고 싶은 일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 갈등하던 때였다. 같은 팀에서 근무한 지 5년 정도가 되었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고민이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번아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속한 팀은 유명인과 같이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전시를 준비하거나, 재미있는 고객 참여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제법 말랑말랑하고 흥미로운 점이 많다. 리버풀에 가서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광고 영상을 만들기도 했고, 수소를 활용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변죽을 울리는 업무처럼 느껴졌고 내가 단순 포장업자가 된 것처럼 여겨졌다. 고기를 먹을 때 질 좋은 소금과 양념과 같이 먹으면 그 맛은 극대화가 되겠지만 근본은 고기의 질이 좋아야 한다. 고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때, 나의 업무는 여기서 질 좋은 소금과 양념 정도 역할이었고, 본질에 해당하는 업무는 아닌 것 같았다.
동시에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딜레마를 말이다. 살면서 알게 된 삶이 주는 얄궂은 교훈은 뭔가를 취하면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식에서 low risk high return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듯, 나도 원하는 바를 다 가질 수는 없었다. 나의 업무가 비겁하게 느껴져서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쌓은 전문성은 모두 포기해야 하고, 지금 같이 일하는 좋은 동료들과 안정적인 환경도 모두 작별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이 내게는 하나의 큰 모순처럼 다가왔다.
이러던 와중에, 양귀자의 소설 ‘모순’을 알게 되었다. 출간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베스트셀러가 되어 젊은이들이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양귀자라는 작가의 이름을 학창 시절 언어 영역 공부할 때 많이 접한 후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없었는데, 역주행을 하는 책 내용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시대를 넘어 젊은이들에게 울림이 주고 열광하는 부분이 무엇일까 의아했다. 그리고 삶의 지침이 되어준다는 말에 나의 딜레마에도 답변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책을 냉큼 구매했고, 의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2. 줄거리 간략 요약
어느 꽃피는 3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는 안진진은 불현듯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결단한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유심히 관찰하고, 전 생애를 탐구하면서 살기로 결정한다. 안진진은 가난과 가정사로 찌들었지만 생활력 강한 엄마, 술만 마시만 폭력적으로 바뀌다가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 그리고 폭행죄로 징역을 살게 된 남동생, 우리 가족과 대비되게 안정된 삶을 살고 우아한 이모를 동경하며 이모와의 우정을 키워간다. 또한 안진진은 반대의 성격을 가진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결혼할 남자를 결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 안진진의 일상에 5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오고, 이모가 놀라운 선택을 하면서 안진진은 삶과 사랑에 대한 본인만의 정의를 내린다.
3. 모순 속 모순
책은 쉽고 재미있게 읽혔는데, 우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다양한 모순적인 설정들이 재미있었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은 안진진이다. 진실하고 참되다는 의미의 ‘진’이 두 번이나 반복되는, 말 그대로 진중하고 진실된 이름이지만, 성이 ‘안’씨라서 하나도 안진진한 이름의 소유자다. 이 모순적인 이름을 가진 25살의 여성 안진진은 어느 날 불현듯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결단하고, 앞으로 전생애를 탐구하면서 살기로 결정한다. 아래 기재한 대사와 같이 자신의 삶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을 안진진의 각성된 결말 부분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커리어에 대한 고민에 매몰된 나에게도 울림 있는 메시지를 줄 것만 같아 기대감이 커져갔다.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중략)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안진진의 대사 인용)”
소설에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펼쳐지지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안진진이 결혼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닌 결혼배우자 후보로 김장우와 나영규 2명이 등장하고, 안진진은 두 사람 속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정을 지난다. 김장우는 낭만주의자이고공상가이고, 나영규는 현실적이고 계획적이다. MBTI로 치면 김장우는 INFP 같은 사람이었고, 나영규는 ESTJ처럼 생각될 만큼 대비되는 인물이다. 김장우는 감성적이고 너무 지나치게 착해서 안진진을 답답하게 하고, 나영규는 추진력은 있지만 너무 계획적이라 안진진을 가끔 숨 막히게 하고 지루하게 한다.
안진진이 결혼 배우자를 정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안진진도 원하는 것을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나와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 것 같았다. 안진진은 어떤 근거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궁금했다. 안진진에게 나를 대입해 보자면,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익숙하고안정적인 커리어를 유지하는 것이 나영규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고, 내가 하고 싶고 가슴이 뛰는 일을 향해 가는 일이 김장우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응원하지 않는 사람과 맺어져서 실망스러웠다는 것은 아니다. 결혼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후반부에 안진진의 심경에 영향을 주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그 속에서 안진진은 배우자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주인공의 감정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촘촘하지 않아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모순의 감정을 느꼈다.
“인생이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안진진의 대사 – 소설의 마지막 독백)
소설의 결말에 대한 고민은 안진진의 마지막 대사를 이해하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작가는 결국 어떤 정답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본인의 답을 내는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것이 곧 삶이라는 것을 싶었던 것이다. 한번 선택을 꼬아버리느라 설령 그것이 훗날 잘못된 선택이 되고 실수임으로 판명 나도 말이다.
4. 삶이라는 모순을 대하는 방법
안진진의 마지막 독백을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을 선명하게 밝힌 두 가지 지점이 있었다. 우선 나는 소설 ‘모순’을 통해 내 선택에 대한 명확한 지침과 논리를 구하려고 했었다. 더 나아가 나의 소명을 찾고 싶다는 명목 하에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지, 새로운 일을 할 것인지 2지선다의 불변의 정답만을 갈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 모순에서도 김장우와 나영규를 선택한 후 안진진은 평생 행복했고 결혼 생활의 정답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를 포기했고, 누구를 선택했다는 자체에 집중한다. 이렇듯 인생에는 선택들만 있을 뿐이고, 선택을 내리는 내 감정과 생각도 계속 변한다. 답을 먼저 탐구한 후 적용시키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선 부딪히고 선택해 가면서 나만의 답을 만들고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답을 찾기 위해 너무 급하게 서두르거나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부딪히고 살아가다 보면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 정리될 것이다. 지금 계속 결정을 못 내리고 유예시키는 이유는 때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안진진이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며 자신만의 배우자 해답을 찾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우선 삶을 직접 살며 천천히 답을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결국모순은 내게 답을 주지 못했다. 다만 방향성만 알려주었다. 직접 어떤 식으로든 선택해서 경험하고 부딪혀 보면서 너의 답을 찾으라는 조언을 주었다.
다시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커리어에 대한 딜레마는 지금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있다. 안진진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의외의 선택을 했던 것처럼, 나도 한번 내 커리어를 한번 꼬아보기로 결정했다. 말레이시아에 신설 법인이 설립되어 3개월 파견 기회가 생겨 말레이시아에서 마케팅 업무를 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파견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정말 할 게 많았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그 과정 속에서 마케팅 업무가 가진 전문성과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브랜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브랜드를 소개하고 우리 브랜드의 장점을 잘 전달해 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마케팅이 비겁하거나 포장업이 불과하다는 내 생각은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물론 얄궂은 삶은 모순 덩어리이기 때문에 내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더 가슴 뛰는 일을 만날 수도 있고, 다시 한번 마케팅에 회의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어떻게 답을 찾아가야 하는지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무작정 해답을 내려고 조급해하지 말 것. 내게 시간을 주며 선택을 두려워하지 말 것. 그리고 그 선택들을 답으로 만들어 갈 것. 삶이 내게 던질 무수히 많은 모순과 질문들, 반전들 사이에서 나는 잘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