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종 박물관을 다녀왔다. 종의 몸체를 치는 도구를 타종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종이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종이 마음이라면 어떨지 떠올려 보았다. 그렇다면 타종봉은 무엇이 될까. 바로 모른척하고 넘겼던 나의 사소한 난관들이다. 타종봉이 처음부터 제 역할을 한 건 아니었다. 무른 흙이라고만 여겼던 장애물이 점차 굳어버렸고, 이내 무거운 타종봉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뒤늦게야 마음을 치기 시작했다. 평온하다고 여긴 그간의 마음에 혼란스럽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생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습관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자신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특성인데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지.'하고 깨닫는 순간 한없이 생소한 느낌이 든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수집하는 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종처럼, 저마다 다른 울림을 가진 마음을 정리해 놓는 거다. 그런 박물관에 서로 왔다 갔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지.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될 테지. 오가는 동안은 '다름'에 대한 오해가 인정으로 향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인정을 넘어 결심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일부러 멀리 있는 카페에 갔다. 집에서부터 45분이 걸리는 이곳에는 코타츠(일본에서 쓰이는 난방기구)와 고양이가 있다. 포근한 이불을 걷어내자 '몰래냥'에 당첨됐다는 걸 알았다. 고양이가 코타츠 속에 들어가 있는 자리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기만 해도 모자란 이 따뜻한 생명체들이 좋다. 앞에서 편히 자는 두 고양이 덕에 마음껏 다리를 뻗지 못하기는 하지만. 다리에 쥐가 나도 차마 깨우고 싶지 않다. 좋아하면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양보하고 싶어진다. 이런 마음을 수집할 수 있던 건 그들이 나와 달랐기 때문이다. 다른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깨달은 사실이 있다. 새삼 이제 알았냐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주변에 큰 호기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더 도드라지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는 무슨 건물이지? 어, 저기 이층집에는 누가 살까? 이 의자 말이야, 가다가 힘들면 앉으라고 내놓은 건가?" 여행 중 처음 접한 도시가 신기해서 그런지 유독 많은 질문을 던지는 나를 보고 디디가 웃었다. 그런 걸 자기가 어떻게 아냐며 남 일에 관심이 많단다. 되짚어보면 이야기를 넣고 궁금해하는 일이 나에게는 일종의 패턴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그와는 오랜 시간을 지나왔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듯 서로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이란 걸 느낄 때가 있었다. 아주 당연한 것이다. 레고를 보면 같이 만들기를 원하는 나와, 혼자 조용히 집중하며 만들기를 원하는 디디만 봐도 알 수 있다. 정해진 방법과 원칙이 틀어지면 스트레스 받는 그와, 틀을 무시하고 일단 꾸려가는 걸 택하는 나는 떡볶이 뷔페를 갔을 때도 확연히 갈리고는 했다.
누군가를 오래 본다는 건 그만큼 나를 알아간다는 뜻도 된다. 다름은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박물관은 나만의 박물관으로만 여겨도 충분할 듯하다. 타인을 보기 전에 나를 제대로 보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수집된 마음들을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
봄인 줄 알았더니 겨울이다. 그렇게 겨울인 줄 알았는데 봄이 됐다. 나의 타종봉과 관련 없이 이어지는 계절은 다시 한번 꽃잎을 드러냈다. 흐르는 계절에 종을 맡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