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는 되도록 구체적인 머리 스타일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의 원인이 된 데는 석연치 못한 나의 답변에 있었다. "그냥 이 정도로 잘라주세요."라는 말은 머리카락을 맡기는 입장에게도, 맡게 된 입장에게도 좋은 제시가 아니었다. 안경을 벗고 의자에 앉아 가운을 두르는 순간부터 시야가 온통 흐리멍덩해진다는 사실도 간과했다. 목덜미가 휑해진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줄이야. 덥수룩한 단발은 못난이 머리로- 아니, 숏컷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한번 자르면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걸 인지해야 했다.
내 속에 빈 공간이 있다. 무언가 빠져나갔을 때 돋보이는 공간. 누구에게나 있는 목마른 공간. 허전하다는 감정이 오면 덜 고픈 배를 달래서라도 채우고 싶은 욕구가 들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채워야 할수록 비워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독립출판하려면 지나치면 안 돼요. 꿈을 팔아요.>
책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1년 전, 책을 주문할 때 함께 온 종이에 적혀있는 문구였다. 하고 싶은 게 뚜렷해질수록 욕심이 커져감을 알았던 건지 혹은 쓰고 그리는 이유를 다시 새기라는 경고인지 내 앞에 놓인 문구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욕심은 나를 작아지게 했다.
"아까워. 나한테 쓰는 게 아까워." 다그치지 않아도 되는데 이미 쪼그라든 자신을 기어코 사포로 문질러버린다. 돌을 던지고 가시로 찌르는 건 다듬는 게 아닌, 훼손에 가깝다. 어쩌면 나는 모순적인 사람인 게 아닐까 하고 궁금해졌다. 세상의 기준에 삶을 끼워 넣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단단해져야 한다는 마음을 먹을수록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는 일이 가장 두려웠지만, 이보다 내가 나를 먼저 재단하고 있었다.
채우기에도 부족한 빈 공간을 어째서 더 비우기 위해 애쓰게 되는 걸까.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왜 나를 향해 더 뾰족한 가위를 들게 하는 걸까. 이 모든 재단은 '맞는 걸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확신을 얻고 싶었을 거다. 이게 맞고, 분명 틀리지 않았다는 백 퍼센트의 확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확신의 정의였을 것이다.
확신의 의미를 바꾸지 않으면 재단을 멈출 수 없다. 다시 찾은 확신은 불안이 있어도 믿고 걸어가는 것. 증명되었다기보다, 정말 완전한 내 길이라기보다 목적지를 몰라도 일단 걸어가는 것. 걸어가며 드러나는 것.
나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 마음을 갉아먹는 돌과 가시를 걷어내고, 새롭게 탄생할 공간을 기다리고자 한다. 아직 재단하기에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