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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텍이 Dec 14. 2021

종이에 눌러쓴 사랑

삶기술학교 뉴스레터 제삶지대 55호 2021. 8.13 Fri

처음으로 쓴 편지 기억하시나요? 저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학교에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쓰라고 하셔서 나름 머리를 쥐어짜며 무엇이 감사한 지에 대해서 썼답니다.


편지가 도착한 날 부모님이 읽어보시고 ‘곧 엄마 아빠랑 헤어질 것 같이 편지를 썼냐’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뭐라고 썼냐면요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말 안 들을 때도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문장들을 두 페이지에 걸쳐 썼어요.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어린 날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랑 좀 다른데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그 후로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쓰고, 받아보기도 했고요. 표현하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편지 쓰는 것이 쉬워졌냐고 하면 그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 그때 겨우 고르고 골라서 쓴 문장이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서 행복해, 너무나 행운이야’ 였거든요. 제 마음은 그 이상인데 그걸 표현할 단어를 몰라서 마음 한구석이 속상하더라고요. 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는 이전보단 능숙하게 알게 됐지만 그래서 더 표현하기가 어려워진 것 같아요.

경험해보고 난 뒤엔, 편지라는 단어 그 자체가 편지의 의미를 담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을 얇은 종이 단 몇 장에 겨우 구겨 넣는 것 같아서요.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장면들을 마구 재생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만약 누가 제게 ‘가장 가벼우면서 무거운 게 뭐냐’고 물어보면, 전 편지라고 대답할 수도 있어요.


편지에 대해 스스로 이런 정의를 내리고 난 후부터는, 더 오랜 시간을 들여 편지를 쓰고 있어요. 역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한 문장으로 다듬어 내는 것은 한 단계 더 어려운 일 같아요. 그렇지만 이 과정을 거친다면, 편지를 쓰는 ‘나’도 같이 행복해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요,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인 ‘편지 쓰는 순간’에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오래간만에 만날 친구들을 위해, 방에 불을 켜고 제가 인화한 사진 뒤에 펜으로 짧은 편지를 썼어요. 내용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시와, 뒤에 제가 응원하는 몇 마디였는데요.


그 편지가 친구들에게 어떤 선물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걸 써 내려가는 시간만큼은 제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 친구들이 제 손과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는 사람들이고, 제가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쓸 수 있게 해준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져서요. 문장을 써 내려갈 때마다, 마음이 잉크로 스며나오는 것 같은 환상 같은 시간을 경험한 거예요.

저는 늘 독자님이 더 아름다운 날들을 살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저처럼 독자님이 평생 가슴에 품고, 두고두고 꺼내어 보며 스스로를 보듬을 수 있는 편지가 있기를, 그리고 그런 편지를 언젠가 써보셔서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녹인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이 단락이 되는 장면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편지가 그저 글 뭉치가 아닌 ‘받는 사람과 나의 세계가 잠시 이어지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였으면 해요.


오늘 읽어주신 이 뉴스레터의 한 줄이, 언젠가 독자님을 편지지 앞 펜을 잡는 데까지 이끈다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도 수고 많으셨어요. 독자님의 앞으로의 매일매일이, 잊을 수 없는 편지의 한 줄처럼 아름답길 바랍니다.


- 여러분을 응원하는 삶기술학교 YON


소개하고 싶은 것들



마음을 담은 선물과 편지 - 정성을 담은 일오백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

존경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을 알아주는 술 ‘일오백’을 만나보세요.


일오백은 뉴스레터가 발행되는 이곳, 삶기술학교가 있는 한산의 ‘소곡주’라는 긴 역사를 가진 술을 정성으로 잇고 있어요.


소곡주는 이 지역의 깨끗한 물과 쌀, 국화와 누룩, 그리고 정성을 넣어 만든 꽃을 품은 달콤한 술입니다.


더 맛있고, 더 정성 들인 술 소곡주 일오백을 카카오톡 스토어에서 만나보세요.

뜻깊은 일오백과 함께 더 큰 행복을 느끼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할게요.



[책]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대필가’ –  츠바키 문구점” (오가와이토)



주인공 하코토의 집안은 대대로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를 업으로 하고 있어요. 포포(하코토의 별명)는 훌륭한 대필가로 키워내기 위한 할머니 (책에서는 선대라고 부름) 밑에서 엄격하게 자라다,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대필을 그만두었는데요. 선대가 죽고 난 후, 다시 11대 대필가의 길로 뛰어들며 대필을 의뢰하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포포는 대필 의뢰를 받으며 편지에 대한 모든 것들을 고민하는데요. 내용뿐만 아니라 종이 질감, 편지지 색깔, 세로쓰기/가로쓰기, 우표를 붙이는 방법, 글씨체, 말투, 글을 쓰는 도구, 잉크색 등 하나하나 ‘어떻게 하면 진심을 잘 전달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어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책의 맨 뒤에 있는 ‘포포의 편지’입니다. 포포가 쓴 편지들이 구현되어 있는데요.


이 편지들을 읽으며 책을 읽다 보면, 편지란 게 단순히 용건만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와요. 언젠가는 몇 줄 안되는 문장에 온 정성을 들인다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았어도, 이 책을 읽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성 들여 편지를 쓰는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일 수가 없어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심하며 글을 쓰는 한 사람의 뒷모습은 반짝반짝 빛날 것 같아요. 


선대와의 관계에서 받은 내면의 상처를 보듬으며, 대필 의뢰를 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연과 어우러지는 포포의 생활 그리고 가마쿠라를 그리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모두 모였어요.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슬로우 무비를 본 듯한 느낌이 들어요.


편지의, 편지에 의한, 편지를 위한 : 편집샵 '글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글월’입니다. 이곳엔 편지와 관련된 모든 것이 있어요.. 이름인 ‘글월’도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편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해요. 이곳은 온라인숍과 오프라인 숍 둘 다 운영하고 있어요.


편지지, 문진, 잉크, 스티커 각종 문구는 물론이고 편지와 관련된 책과 조명까지 글월만의 시선으로 선택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어요. 글월에서 편지와 관련된 멋진 물건들로 눈이 즐겁기도 하지만요, 더 좋은 건 글월만의 서비스에요. 이곳에서는 ‘편지’를 쓸 수 있어요. 준비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새롭지만 편안한 공간에서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면 꼭 어딘가 여행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거예요.


더 재밌는 글월의 포인트! 글월에는 ‘펜팔 서비스’가 있어요.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거예요. 먼저 편지를 한 통 쓰고요, 카운터에 내 편지를 내면서 다른 사람의 편지를 가져갑니다.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도 무관해요. 나를 밝히지 않고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얼굴이 전혀 모르는 누군가와 편지로 친구가 될 수도 있고요.


문득 누군가에게 글을 써서 보내고 싶은 날엔, ‘편지의, 편지에 의한, 편지를 위한 글월’에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영화] '추신 : 나도 네 꿈을 꿔’ - 영화 : 윤희에게 (2019)




어느 날, 일본 오타루에서 한국의 윤희에게 편지가 도착했어요. 이 영화는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눌러 쓴 편지가 어쩌다 보내지면서 시작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새봄이는 엄마 ‘윤희’에게 온 편지를 발견하는데요, 편지를 몰래 읽어본 새봄이는 편지가 온 ‘오타루’로의 여행을 계획해요.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웠던 엄마의 사랑을 찾아 떠난 오타루. 105분 동안 화면 속에 그려지는 눈으로 덮인 새하얗고 눈부신 장면들.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해 주는 마음을 눌러쓴 편지를 담담하게 읽는 내레이션. 105분 너머의 인물의 삶이 인물들의 표정과 하나하나 새겨져있고요.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섞여 이런 영화는 ‘윤희에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엔, 편지를 읽는 음성이 문득문득 생각난답니다. 편지가 그리운 날, 겨울이 그리운 날엔 ‘윤희에게’에서 그려내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감상해보세요.


준에게서 윤희에게 온 편지를 읽고, 윤희가 답장한 편지의 내레이션을 첨부합니다.. 전체 오디오트랙을 보시면, 이 내레이션이 끝나고 바로 다음에 ‘추신 – 나도 네 꿈을 꿔’로 시작하면서 음악이 시작되는데요. 연결 되는 두 곡으로 화면 없이, 영화 ‘윤희에게’를 잠시 만나보세요.


[영화] 문자로 그려진 고흐의 일생 - 영화 '빈센트 (2010)' 과 웹사이트 'Vincent van Gogh' - The Letters'


다큐멘터리 장인 bbc에서 만든 고흐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원제는 Painted with words, 한국 제목은 ‘편지에 담긴 고흐의 삶’ 이었는데, 최근 왓챠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반 고흐’로 올라가있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죠. 고흐의 화풍과 그 화풍이 빚어진 시기의 삶은 이제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에요. 고흐의 열렬한 팬들은 그의 일생을 다 찾아보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대게는 고흐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포커싱 되어있어요.


고흐는 삶의 마지막까지 동생 테오, 그리고 주변 가족들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고흐의 10대 시절 편지를 보여주면서 그의 일대기를 그려요. 고흐는 일생에 총 902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땐 멀리 있는 상대에게 ‘유일하게’ 소식과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을 테니, 편지의 의미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고 깊은 의미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고흐에게도 어린 날들이 있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품을 그린 날들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 그의 일생을, 고흐의 시간을 가둔 편지를 통해 훑어볼 수 있어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영화 시작에 이런 자막이 나와요 ‘every word spoken is true’ 영화에 나오는 모든 말은 실화래요.


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것처럼 고흐의 편지들을, 모아둔 사이트가 있어요. 시기/송신인/장소/스케치가 포함된 사진 별로 편지를 분류해서 볼 수 있어요. 원하는 편지를 클릭하면 왼쪽엔 텍스트가, 오른쪽엔 그 세부적인 내용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같은 내용이 나오고요, 왼쪽 창 메뉴 중 facsimile을 선택하면 ‘진짜 고흐의 편지’를 볼 수 있답니다.


남아있는 고흐의 첫 편지, 사랑하는 동생의 ‘테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첨부합니다. 궁금하시다면, 클릭해서 구경해보세요.


[음악] Akira kosemura 의 'Letter' (앨범 embers 중에서)

akira kosemura 작곡가의 embers 앨범에 들어있는 letter입니다.

음악을 찾다 보니, ‘편지’와 관련된 곡은 이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편지에 담기지 못할 내용들은 없겠고, 이별이 늘 슬픈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는 독자님이 편지를 떠올리면, 행복한 마음이 솟으셨으면 했어요.


잔잔하고 밝은 느낌의 곡을 골라봤어요.

이 곡처럼, 언젠가 편지의 한 줄이 될 수 있는

독자님의 오늘이 잔잔하고 행복하게 흘러갔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사랑을 담아 삶기술학교 yon


편지를 보낸, 삶기술학교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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