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의 낭만은 3개월 만에 끝났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직장이 그토록 원하던 '출판사'였으니까요.
그것도 문화와 낭만의 중심, 홍대 한복판에 있는 3인 규모의 작은 회사.
내성적이고 겁 많은 사회 초년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처럼 보였습니다.
제주도에서 갓 상경해 포트폴리오도 빈약했던 저를,
대표님은 "가능성이 보인다"며 받아주셨습니다.
그날 밤, 저는 가슴이 너무 벅차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출판계의 문턱은 예나 지금이나 높습니다.
인쇄 사고는 곧 비용 손실로 직결되기에 신입에게 관대한 곳이 아니죠.
인쇄소 기장님들이 쓰는 낯선 일본어 용어들 사이에서 눈치로
살아남아야 하는 곳. 그 전쟁터에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사히 한 달쯤 넘겼을 때였습니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진 마감 작업을 마치고,
10시에 출근한 날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수면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 점심을 거르고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청했습니다.
오후 업무가 시작되고,
300페이지 분량의 외국 소설 교정지를 검토했습니다.
'글자 하나라도 놓치면 끝이다.'
강박에 가까운 조심성 때문에 1시간이면 끝날 일을
세 번, 네 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비효율적이었을지언정, 저는 제 딴에
최선을 다해 '완벽'을 기하고 있었습니다.
퇴근 무렵, 대표님이 저를 호출했습니다.
"ㅇㅇ씨, 교정 확인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저는 잔뜩 굳어서 변명 아닌 설명을 했습니다.
실수할까 봐 여러 번 확인하느라 늦었다고,
다음엔 속도를 내겠노라고. 질책을 각오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날아와 꽂혔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다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합니까?"
"대리님이 그러던데, 아까 ㅇㅇ씨 불 끄고 잤다면서요.
자느라 일 안 해놓고 왜 꼼꼼히 한 척합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점심시간에 밥 대신 잠을 선택한 것이,
'근무 태만'으로 둔갑해 대표님 귀에 들어간 것입니다.
심지어 저와 한 달 동안 사적인 대화 한 번 섞지 않았던
대리님이, 제 쪽잠을 그런 식으로 보고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이미 대표님 마음속에 저는
'게으른데 거짓말까지 하는 신입'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차라리 "손이 느리다", "센스가 없다"라고 혼났다면
밤새 연습해서 고쳤을 겁니다.
하지만 제 진심과 도덕성을 의심받는 상황은
스물네 살의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죄인처럼 회사를 다녔습니다.
닫혀버린 대표님의 마음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은커녕 석 달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야 했습니다.
홍대 거리를 걸어 나오며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나치게 꿈에 젖어 있어서 현실 자각이 없었구나.'
책을 만드는 건 낭만적인 일일지 몰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냉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돌이켜 보면 저는 참 어설픈 사회인이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의 스물네 살의 저를 만난다면,
"쫄지마! 죄지은 것이 없는데 왜 잘 못한 것처럼 굴어!"
"허리 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저 그 회사는 제가 스쳐지나가는 정박지일뿐 도착지는 아니라고
더 큰 길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일 뿐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