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 정의 구현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영어 학원에서의 짧은 일탈을 마치고 다
시 본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문화·예술을 다루는 비영리단체였습니다.
'문화 기획'과 '홍보물 디자인'. 겉보기엔 꽤 그럴싸하고
멋진 일을 하는 곳이었죠.
어쩌다 보니 저는 입사와 동시에
'본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경력에 맞지 않는 과분한 감투였지만,
실상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 꼭대기에서,
대표 포함 총 5명이 북적이는 작은 조직의 '왕선임' 역할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리지만 총명한 기획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하나씩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뿌듯했으니까요.
하지만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더군요.
'오피스 빌런 총량의 법칙'.
이 5명밖에 안 되는 작은 조직에도,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절대 악이 존재했습니다.
네, 바로 대표님이었습니다.
상사란 으레 껄끄러운 존재라지만,
이분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출근해 보니 이미 전설적인 꼬리표들이 따라다니더군요.
"성미가 급해 횡설수설한다", "직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다",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진다", 심지어 "직원 퇴근 후 몰래 책상과 PC를 뒤진다"까지.
6개월 이상 버틴 직원이 없다는 괴담이 사실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하고 싶은 일을 만났는데...'
불안했지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실력으로 증명하면 달라지겠지 하고요.
하지만 입사 두 달 즈음, 20대 중반의 어린 직원이
울먹이며 꺼낸 말에 제 이성의 끈은 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본부장님 없을 때... 대표님이 저한테 볼펜을 던지세요.
소리 지르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열정 페이,
주말 수당도 없이 밤낮으로 헌신하는
사회 초년생에게 윽박도 모자라 물건을 던지다니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찰나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외근 후 복도로 들어서는데,
대표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계단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삿대질을 하며 직원들에게 논리적이지도 말의 앞뒤도 맞지 않은
그저 악에 받친 화풀이 었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습니다.
잠깐 기억이 멈춘 듯했습니다.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잡동사니가 든 박스를 든 채로 서있는
저를 직원이 쫓아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대표에게 윽박질렀습니다.
드라마처럼 멋지게 직원들을 이끌고
나와서 '나만 믿어!' 했으면 좋으련만.
기껏해야 하고 싶은 말만 다다다 빠른 속도로
말하고 사표 내고 나오는 꼴이라니.
이건 남은 직원들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습니다.
성인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또 똑같이 어린 직원들을 변호했을 거라는 건
변함없을 겁니다.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다"며 웃어주었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탈출을 준비 중이었다면서요.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이곳은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액땜이었다"며
쓴웃음을 삼켰습니다.
그날의 '우발적 퇴사'는 제 인생의 항로를
또 한 번 엉뚱한 곳으로 틀어놓았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 지켜져야 할 휴게 시간,
그리고 인격적인 대우.
이 당연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선 '디자인'이 아니라
'법'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래! 노무사가 되자! 저런 사람들을 법으로 응징하자!"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저의 이직 표류기는 이렇게 또
엉뚱한 방향으로 좌표를 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