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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 Nov 17. 2019

일상을 설계하는 연습이 필요해.

퇴사 후 일상, 상상과 현실

    내 나이만큼 함께한 '시간'인데 아직도 사용법이 낯설다. 퇴사 후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했던 기간은 겨우 삼일 남짓이었다. 사흘째에 접어들 때부터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상한 퇴사 후 일상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 그림 안에는 오롯한 쉼도 들어있었고, 미래를 위한 열정도 들어있었다. 촘촘한 일상이 가득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것처럼, 퇴사 후의 삶도 내 기대처럼 흘러가 주지 않았다.   

    나는 원룸에 살고 있었다. 원하는 시간에 느긋하게 잠들어서 편안히 눈을 뜨면 아침 10시, 꼼짝없이 누워있다가 점심을 먹고 막 하루를 시작하려 하면 어쩐지 12시가 넘어있었다. 들어찬 짐 때문에 눕고 일어나고 앉는 세 가지 동작만 가능했다. 무작정 밖을 돌아다니기엔 추운 날씨였고, 이제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도 강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시간이건만. 좁은 공간에 제한 없이 주어진 스물네 시간은 전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는 지독히 길었고, 무늬 없는 일주일은 지독히 짧았다. 학교, 회사, 시작과 끝, 정해진 기한, 나는 이미 설계된 하루를 사는 것에 훨씬 익숙한 사람이었다.     


    볕을 한 번도 안 보고,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무료한 나날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점점 나 자신을 집안에 가두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사는 공간이 좀 넓었다면 집안에서 이런저런 일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원룸 생활자였기 때문에 무조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방황 아닌 방황이 너무 길어지기 전, 운 좋게도 집에서 오 분 거리에 널찍하고 조용한 카페가 생겼다. 나는 거의 매일 그곳에 갔다. 가서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이런저런 계획도 세웠다. 일상에 최소한의 뼈대를 세우니 채워 넣을 여백이 따라왔다. 자연스럽게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디자인 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종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감사했다. 엎질러진 물처럼 무용하게 느껴졌던 시간을 제대로 된 연료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최소한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 강제하지 않아도 시간을 즐길 수도, 활용할 수도 있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상을 설계하는 데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취미가 없는 게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다. 세상에는 즐기는 인간과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예전의 나는 온전히 재미를 위해서 뭔가 하는 시간을 늘 아깝게 느꼈다. 느긋함이 부족한 성격이었다. 유용한 일이 아니면 일상에 잘 들여놓지 않았다. 그나마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책조차, 나이가 좀 들고 나서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비문학을 더 자주 읽었다. 여전히 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좋지만, 그게 좋은 것과 그것만 즐길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쏟고,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시간과 친해지며 이런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무기력이란 중력을 이겨내려면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일으켜야 한다. 자연스럽게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효용이 아니라 즐거움의 기준으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지금은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취미가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이제야 알았다. 즐기지 못하는 인간에서 즐기는 인간이 되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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